가상자산 업계에서 법정통화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국내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단순 투자부터 용역의 대가, 향후 사업 진출 대비 등 보유 목적도 다양하다. 카카오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 말 현재 테더(USDT) 117만 개를 보유하고 있고 소프트웨어(SW) 업체 업라이즈와 아데나소프트는 각각 약 65만 개, 64만 개의 USDT를 갖고 있다. 크레프톤(9만 개) 같은 게임 업체도 USDT를 상당수 보유 중이다. 김민승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웹3.0 기업들은 직접 발행한 가상자산을 취득하거나 사업 관련 테스트 및 각종 비용 처리를 위해 USDT를 비롯한 가상자산을 취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스테이블코인 시대가 개인 결제를 넘어 기업 간 거래 시장으로 넘어오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스테이블코인 관련 논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USDT와 유에스디코인(USDC) 등의 글로벌 지배력이 급속도로 커진 것은 주요 가상자산거래소들이 모든 거래의 기본이 되는 기준 통화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달러가 국제금융거래에서 기축통화로서 지급결제의 역할을 맡고 있다면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이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12일 가상자산 테이터 플랫폼 코인게코에 따르면 이날 기준 글로벌 1위 거래소 바이낸스에서 가장 많은 비중으로 거래되고 있는 통화는 USDT로 56.4%에 달한다.
또 다른 달러 스테이블코인인 퍼스트디지털유에스디(FDUSD)와 USDC가 각각 15.33%, 8.6%로 뒤를 이었다. 통화별 거래 대금의 약 80%를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차지하고 있다.
다른 글로벌 대형 거래소의 상황도 비슷하다. 오케이엑스는 USDT 85.32%, USDC 3.45%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전체 거래 대금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며 바이비트의 경우 USDT 86.32%, USDC 4.24%로 90%를 상회한다. 반면 국내 1위 거래소인 업비트에서도 USDT로 다른 가상자산을 거래할 수 있지만 거래 비중은 0.03%에 불과하다. 99% 이상이 원화 거래로 이뤄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가상자산 이용자들이 실명 계좌로 입금한 원화를 통해 가상자산을 사고판다면 다른 글로벌 거래소에서는 법정화폐 대신 USDT나 USDC 등으로 가상자산을 거래하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가상자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시장 초기부터 주요 거래소들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간 데다 안정성과 편의성을 기반으로 이용자들에게도 많은 선택을 받으면서 선점 효과를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결제·송금 등 실물경제 침투에 대응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이를 국내 거래소의 기준 통화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업비트·빗썸 등 국내 거래소의 거래량이 세계 최대 거래소와도 맞먹는 수준인 만큼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시드오픈리서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 세계 가상자산 거래량에서 원화가 미국 달러를 상회하기도 했다. 스테이블코인을 제외한 순수 법정화폐만의 비교지만 한국과 미국의 경제 규모 차이를 고려하면 투자 금액과 활성도가 상당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변주웅 포필러스 프로젝트매니저는 “USDT 사례처럼 스테이블코인의 초기 도입과 성장에서 거래소가 상당한 역할을 한다”며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돼 국내 거래소들이 기준 통화로 채택할 경우 한국의 높은 거래 활성도가 영향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법정 원화 → 은행 실명 계좌 → 거래소 입출금 통제’로만 이어지는 현행 발행·유통 구조를 다시 짜야 한다는 조언이 제기된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김용범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는 “은행 없이도 유통되고 법정통화를 직접 거치지 않아도 거래소 안에서 디지털통화처럼 작동할 수 있는 구조가 등장했다”며 “은행 기반 규제 해체는 하지 않으면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거래소, 발행자, 지갑 사업자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신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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