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헌법소원은 금융 관치라고 하는 우리 경제의 오랜 문제에 대한 헌법적 평가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2017년 12월 13일, 국무조정실은 가상통화 관련 긴급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암호화폐 관련 정부의 대응방침을 발표했다. 은행이 암호화폐 거래자금 입출금 과정에서 투자자 본인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신규 투자자의 진입을 막아 암호화폐 투기 확산을 막는다는 취지였다.
정부는 같은 달 28일 이 같은 구상을 다듬어 이른바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를 발표했다. 이 조치에 따라 시중 은행들이 암호화폐 거래소에 가상계좌 발급을 중단했다. 거래소에 신규 투자자 유입이 막혔다. 이후 거래소들이 실명제에 따르기 위해서는 은행에서 계좌를 받아야 했지만 은행들은 대형 거래소 서너 곳을 제외하고 실명계좌를 터주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당시 조치로 1월 400만 명에 달했던 암호화폐 투자자 가운데 100만 명이 투자가 막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으며 연합뉴스는 ‘누구도 금지하지 않았지만 금지된 가상화폐 신규투자’라고 상황을 분석했다.
당시 두 대책을 지켜본 정희찬(사진) 안국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30일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지금까지 헌재에 접수된 암호화폐 관련 헌법 소원사건은 총 5건으로 이 중 4건이 모두 정 변호사가 청구인 또는 대리인을 맡고 있다. 모두 암호화폐 실명제 관련 사건이다.
정 변호사는 “이 사건들을 볼 때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 가상통화 이런 프레임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모피아라고 해야 하나요? 이 사건은 우리나라 경제에 도사리고 있는, 엄연히 존재하고 눈에 띄지만 (다들 익숙해져) 큰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금융 관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정 변호사는 정부의 암호화폐 실명제 조치에는 법률적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는 헌재에 제출한 의견서에도 “정부의 주장대로 법조문에 기초해 명령이나 지시 또는 권고 등이 정말로 이뤄졌다면 이는 행정절차법에 따라 당연히 문서로써 이뤄졌을 것임에도 이런 문서를 정부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말 정부가 발표한 두 차례의 대책은 법률상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암호화폐 거래소가 가상계좌 발급을 중지해 국민들이 암호화폐에 대한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약한 것”이라고 썼다.
정 변호사는 “발표 당시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은 단상에 서서 ‘현행 방식의 가상계좌 활용을 금지합니다’라고 말했다. ‘금지할 예정입니다’라거나 ‘금지를 하도록 입법하겠다’가 아니라, ‘금지합니다’였다”며 “국무조정실장이 어떤 자리길래 어떤 법률에도 근거하지 않은 채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지 (발표 영상을) 보면서도 놀랐다”고 했다. 그는 “국민을, 헌법을 얼마나 무시하면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인가”라며 “그때 헌법소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의 암호화폐 거래실명제 조치를 보면서 1985년 국제그룹 해체 사건이 떠올랐다고 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재무부 장관은 국제그룹의 어음 거래 은행이던 제일은행장에게 국제그룹을 해체하도록 지시하고 은행 측은 국제그룹의 해체를 발표했다. 한때 재계 순위 7위에 올랐던 국제그룹은 이후 정권의 말 한마디에 공중 분해됐다. 주거래은행을 이용해 특정 기업의 자금 흐름을 막는 방식이었다. 이 사건은 추후 헌법재판소로 넘어갔고 헌재는 이를 위헌으로 결정했다. 법률 근거 없이 공권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사실적 권력행위’라고 헌재는 판단했다. 정 변호사는 “국제그룹 해체할 때도 그 표현은 ‘국제그룹을 해체합니다’였다”며 “은행을 이용해 공권력을 구현하는 방식이나, 법도 없이 이런 발표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30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현재 정 변호사와 정부 측의 공방은 치열하다. 금융위 측은 정부의 일련의 조치는 공권력의 행사가 아니며 또 은행들이 정부 조치를 따른 이유는 자발적인 판단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정부는 헌재에 낸 의견서에서 “지난해 12월 13일과 28일 대책들은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관계부처 차관들이 모여 내부적으로 회의를 한 것”이라며 “이는 그 자체로 법적 구속력이나 외부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실행이 확실시되는 최종적인 조치라고 보기도 어려워 헌법소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대책 발표 역시 정부의 내부 논의를 단순히 알려주는 행위라는 게 정부 입장이다. 정부는 또 “은행들은 (가상계좌서비스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과 대응 필요성을 인식하고) 특별대책에 응해 자발적으로 가상계좌서비스의 신규제공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정 변호사는 다시 맞받았다. 그는 의견서에서 “금융당국이 일선 은행에 대해서 갖는 절대적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갑자기 은행이 수신잔고에 큰 도움을 주던 가상계좌 발급을 일시 금지한 후 이른바 ‘가상화폐 거래실명제’를 일부 은행만이 극소수 거래소에만 허락하는 태도를 급작스럽게 취하게 된 것은 금융위가 수차례의 회의와 현장점검 등을 통해 사실상 권력행위를 실행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헌재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미지수다. 정 변호사는 다만 이번 사건이 수십 년 간 이어지는 금융 관치의 역사를 끊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출만 민주화됐지 경제영역과 생활 사회영역은 민주화되지 않았다”며 “관이 밟으면 죽게 마련인 그런 구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 않나”고 했다. 이어 “실제 최근 사무실을 찾아오는 중소기업, 벤처기업 대표들은 투자유치보다 정책 리스크를 더 우려하는 분위기”라며 “법치주의와 삼권분립 자체가 경제활동의 분야에서는 사실상 무력화되는 심각한 현상이 버젓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정 변호사는 “법에 따라 금융, 경제 정책을 편다고 해서 순발력 있는 대응을 못하는 게 아니다”라며 “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정부가 정말 투기나 자금세탁 우려 등으로 긴급한 경제 상황이라고 인식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했듯 대통령이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내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될 일”이라고 했다. 이어 “헌법은 이미 그런 긴급 경제 상황에 대한 순발력 있는 대응 장치를 보장하고 있다”며 “만약 헌재가 이 사건에서 위헌 결정을 내린다면 이는 금융위가 현재 취하고 있는 각종 정책 수단의 근본적 변화를 헌법 차원에서 요청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흥록기자 rok@
- 김흥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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