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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플리] 변영진 "연극 연출은 설명서 없이 레고를 쌓아 올리는 일이다"

극단 '불의 전차' 연출가가 전하는

연극 연출가의 삶이란

배우, 스탭 등 다양한 사람을 설득하고

레고 블록 쌓아가듯 작품으로 융화시켜야



약속한 시간이 되자 배우들이 하나 둘 자그마한 연습실로 모였다. 바닥에는 붉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무대를 가장한 네모난 공간이 그려졌다. 가운데 의자가 덩그러니 놓였다. 그 뿐이었다. 그런데도 연극연출가의 지시가 떨어지자 네모난 공간은 연극 무대로 변했다. 배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연출가는 쉴 새 없이 디렉팅을 이어갔다. '연극 연출은 설명서 없이 레고 만드는 일과 같다'는 변영진 연극연출가의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극단 불의전차 배우들이 연습을 하고 있다. 변영진 연극연출가(맨 오른쪽)는 서서 디렉팅을 진행하고 있다./사진=디센터.




변영진 연출가는 극단 ‘불의전차’를 이끌고 있다. 여기에는 9명의 배우가 속해 있다. 그는 지난 2015년 한국문화예술 신인상 희곡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현재까지 11개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지난 달 6일 대학로에 있는 연습실에서 변영진 씨를 만나 ‘연극연출가’란 직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 자기 소개 부탁드린다.

“극단 불의전차라는 곳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하고 있다.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관객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펼쳐 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 본인이 생각하는 연극연출가란 어떤 직업인가.

“어렸을 때부터 레고 좋아했다. 레고 선물 받으면 설명서는 일단 집어 던지고 만들기 시작했다. 연극 연출도 레고 만들기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내가 좋아하는, 내가 원했던 배우들에게 전화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정말 좋은 작품을 갖고 당신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배우들을 설득한다.

배우가 모인 다음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만약 주변에 성벽이 나오는 연극이면 성벽을 만들어야 하니 박스를 찢어서 성벽을 만든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블록을 쌓는데, 이게 굉장히 재밌다. 이런 작업이 연극연출가라고 생각한다.”

- 연극연출가가 되려면 따로 공부를 해야 하는 건가.

“연극 입시 학원에 들어가 배워서 연극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닌 사람들도 있다. 재정적으로 대학을 못 갈 수도 있고, 뒤늦게 연극 연출가를 꿈꿀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뒤늦게 배우를 꿈꾸고, 스탭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용기를 갖고 모인 사람들이 다 같이 블록을 쌓기 시작하면 그게 되게 재미있고, 그 과정 속에서 정말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

변영진 연출가가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사진=디센터.


- 연극 연출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궁금하다.

“현장에는 연출을 전공으로 하지 않은 연출가가 상당수다. 대학 전공자는 거의 없다. 연출가가 배우도 하고,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희곡도 쓰고 포지션이 엄청 다양하다.

나도 사실 연기를 전공했다. 대학교 때 아서 밀러의 ‘시련’ 작품 공연 준비를 할 때였다. 제3막 법정 씬(scene)에서 서 있는 연기를 하고 있는데, 5시간 동안 연출가가 내 장면이 아니고 다른 장면을 잡고 있는 것이다. 대사는 없는데 어떻게 매 순간 열심히 연기를 하나. 내면 연기를 하다가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서 연출가한테 짜증을 냈다. 나도 좀 하자! 연출가가 너무 융통성이 없다, 너 혼날래! 당시 연출가가 후배였는데 놀라서 울었다.

그때 느꼈다. 아 연극 배우를 하려면 연극의 다른 포지션을 해봐야 알 수 있겠다. 왜냐하면 연극은 다 같이 만들어가는 일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다 연극 연출가를 하게 됐다.”

- 막상 연출을 해보니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 다른 점도 있을 것 같다.

“맞다. 처음에 연출가는 사람만 잘 모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해 보니까 책임감이 생기더라. 엄청 부지런 해졌다. 배우 할 때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두근거림이 생겼다. 내 배우들과 같이 만들어 나가고, 무대 밖에서 관객의 마음으로 공연의 마지막을 바라보니까. 예전에 배우로 공연할 때는 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연극연출가를 하면서 눈물이 났다. 마음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정체성이 다시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나를 찾았다.”

출처=셔터스톡.


- 연극 연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였나.

“책임지고 불러왔던 배우들과 짧게는 3개월 길게는 5개월 간 준비한 작업이 처참히 패배했을 때가 가장 힘들다. 내가 알고 있던 작품의 깊이, 세계, 이렇게 만들면 관객이 좋아할 것이라 예상했던 웃음 포인트 등이 있다. 그런데 막상 관객 반응이 싸하면 정말 민망하고 힘들다. 함께 작품을 준비한 배우, 스탭들에게도 미안하다. 돈 때문에 힘든 건 없다.

그보다는 가능성이 있을지 계속 고민한다. 연극을 한 지 5년이 됐지만 아직도 고민한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우상인 연출가의 길을 감히 따라갈 수 있을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

출처=셔터스톡.


그런데 반 고흐의 삶을 보면서 배운 철학이 있다. 고흐는 죽기 직전까지 자기 작품을 거의 못 팔았다. 그나마 팔린 작품 하나도 되게 저렴한 가격에 팔린 걸로 안다. 고흐는 힘든 삶을 살다가 요절을 했다. 그걸 보면서 정말 죄송하지만 나는 고흐보다는 오래 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 연극으로 진로를 결정한 중, 고등학생에게 실질적 조언을 해준다면.

“연극영화과로 대학 입학을 하려면 입시학원에 가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곳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있지만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게 좋다. 연극은 네트워크가 형성이 돼야 할 수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미술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연극은 혼자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 대표적인 곳이 입시학원이다.

변영진 씨 명함에서 그의 개성이 엿보인다. /사진=디센터.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연출가들 중에 교수인 분들이 꽤 많다. 그 분들이 있는 학교에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그 분들이 동시대를 달리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제일 감각적인 연출가들이다. 연극은 올드(old)하면 안 된다. 힙합도 올드하면 도태되듯 연극도 마찬가지다. 연극은 뉴(new)하고 신선해야 한다.”

- 대학에 간다고 바로 연극연출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내가 정말 아끼는 연극 후배가 있다면 대학로에 가서 지금 상영하는 작품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대신 작품을 선택할 때 스스로 해야 한다. 작품을 봤는데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을 때까지 봐야한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생기면 그 작품의 연출가, 작가, 배우, 극단, 무슨 팀인지를 꼼꼼히 살펴봐라. 그리고 그들이 만든 또 다른 작품을 봐라. 그러면서 줄기를 넓혀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작품이 생긴다. 그때부터 배우를 모으면 된다. 배우를 모으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무식하게 모으는 게 팁이다. 유식하게는 절대 모을 수 없다.”

- 연극연출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연극연출가가 정말 힘들다. 상상 이상이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세계, 만들고 싶은 세계가 있다 해도 그걸 혼자 만들 순 없다. 배우, 스탭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데 이 작업이 어렵다. 사공이 많아서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배우, 친구들이 계속 딴지를 걸 것이다. 이상하다, 별로다, 연출가가 왜 아는 게 없냐. 그럼에도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야 하는 게 연극연출가다.

정말 힘들 때면 셰익스피어 ‘템페스트’의 다음 구절을 떠올린다. "바람과 비, 이슬은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걸 가르쳐 줘. 힘들면 기다려. 그럼 바람 불어온다.힘들면 기다리라. 그럼 바람 불어온다.”




/도예리 기자 yeri.do@
도예리 기자
yeri.do@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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