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공식적으로 가상자산 전략비축에 나섰지만 한국은 관련 논의는커녕 상장사가 아닌 일반 법인의 계좌 개설도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정이 뒤늦게 가상자산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도입을 검토하기로 했지만 주요국과의 규제 격차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주요국이 가상자산 산업 육성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 골든타임을 놓칠 경우 글로벌 경쟁에서 영영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7일 금융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현지 시간) 가상자산의 전략적 준비금을 신설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형사 또는 민사 몰수 절차에서 압수된 비트코인을 비축하겠다는 것으로, 새로운 예산을 투입하지 않아 당초 기대보다는 약하지만 전략비축을 시작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이 금을 비축하는 곳인 포트 녹스에 빗대 ‘디지털 포트 녹스’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미국이 제한적이나마 가상자산을 전략적으로 비축하고 나선 것은 달러 패권을 유지하고 블록체인 산업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도다. 비트코인은 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제한돼 있어 비트코인이 금의 역할까지 대신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미국은 달러와 1대1 교환 비율로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국채 수요를 늘려 달러 위상을 높이려는 움직임에도 적극적이다. 가상자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향후 가상자산 산업이 더 성장할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 또한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가상자산이 새로운 금융 생태계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고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과 홍콩·캐나다 등에서 가상자산 현물 ETF가 출시됐으며 미국과 유럽연합(EU), 영국, 홍콩, 일본, 싱가포르, 캐나다 등 주요국들은 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를 대체로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반면 국내의 경우 지난해 7월 가상자산법 시행 외에는 굵직한 진전이 없다. 지난달 정부가 법인 계좌를 단계적으로 허용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정작 금융회사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미국의 가상자산 정책 변화에 당정이 한 달도 안 돼 현물 ETF 도입 검토로 방향을 틀었다. 현물 ETF가 도입될 경우 금융사도 가상자산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국제적 동향을 살펴보고 현물시장 관련 인프라 구축 등 법률 정비에 필요한 점을 감안해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라며 “가상자산 시장 활성화를 위한 각종 입법에도 속도를 내겠다”고 설명했다. 토큰증권 제도 정비를 위한 전자증권법과 자본시장법, 대주주 적격성 심사제를 도입하는 특정금융정보법에 대해서도 조속히 입법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다. 김병환 금융위원장 역시 “최근 미국 트럼프 정부 출범을 계기로 글로벌 가상자산 제도의 변화가 조금 더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정부는 이러한 글로벌 논의 흐름에 맞춰 가상자산 정책의 보폭을 조금 더 빨리 가져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시장에서는 갈 길이 멀다는 입장이다. 특히 탄핵 국면 장기화에 정책 동력이 떨어져 있다는 점도 문제다. 당정이 원론적인 수준에서 규제 완화와 보완 입법 마련에 속도를 내기로 했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 낼지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로 가상자산 업계의 규제는 많다. 코인게코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가상자산거래소의 거래 대금 점유율은 업비트와 빗썸이 각각 68.9%, 28.7%로 97%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당국 규제는 회사 덩치와 관계 없이 일률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코인원·코빗·고팍스 등 점유율이 낮은 거래소들은 인력 부족과 수익 악화로 당국 규제에 대응하기 버거운 상황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 정보보호 공시에 따르면 업비트 운영사인 두나무는 총임직원 594명에 정보기술 인력 336명을 보유하고 있지만 5위 거래소인 고팍스 운영사 스트리미는 전체 임직원 78명에 정보기술 인력 35명을 보유하고 있다.
가상자산 업계의 관계자는 “어느 때보다 속도가 중요한 상황인데 조기 대선으로 인한 정권 교체 가능성이 나오고 있어 제대로 추진될지 의문”이라며 “정치권에서는 선거철마다 청년층 표심 잡기를 위해 관련 정책을 꺼내들었지만 정작 속도감 있게 추진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 신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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