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가상자산 정책으로 미국 블록체인 업계가 들썩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 블록체인 기업들은 이와 대조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 투자 유치와 함께 유망 기업으로 손꼽히던 대표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국내 사업을 축소하고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형국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블록체인 기술기업 해치랩스는 조직 규모를 10명 대로 감축하고 사업 조직 개편에 착수했다. 해치랩스 관계자는 "재무적으로는 건강한 상황"이라면서도 "국내에서 사실상 기업간거래(B2B) 비즈니스 수요가 대폭 감소하면서 해치랩스도 기존에 펼쳤던 사업을 정리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최근 C레벨 등 요직에 있던 인력도 퇴사했다. 그는 “정규직에서 아웃소싱으로 전환하는 등 체제 변환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해치랩스는 지난 2018년 설립된 기업으로, 가상자산 지갑 솔루션 페이스월렛과 웹3 보안감사 서비스 등 웹3 생태계 운영에 필수적인 솔루션을 법인 사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가상자산을 발행하지 않고도 영업 이익만으로 성장하며 2022년 시리즈A 라운드에서 약 12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당시 기업가치는 2000억 원 이상으로 평가됐다. 국내 기업들로부터 블록체인 기술 수요가 폭발할 것을 대비해 기업 대상 서비스를 야심차게 선보이고 관련 인력을 대규모 채용했지만 시장 예측이 엇나가면서 쓴 맛을 맛봤다.
제도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국내에서 사실상 웹3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 SK텔레콤(SKT)를 비롯해 대기업들은 최근 웹3 분야에 힘을 빼는 모습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 중 황금 같은 회사들이 거의 없어졌다”면서 “온갖 크립토 관련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겠다던 스타트업도 대부분 폐업했다”고 전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친가상자산 정책 기조로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산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미국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는 트럼프 정책에 힘입어 미국 내에서 1000명을 추가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략 비축 자산으로 지목한 미국 기반 가상자산 프로젝트 솔라나, 리플, 에이다 등도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 가상자산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은 다양한 상장지수펀드(ETF)를 잇따라 출시하며 시장 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블록체인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해치랩스도 현재 검토하는 신사업은 모두 해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해치랩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2022년 170억 원 규모 시리즈B 투자 유치를 했던 쟁글도 국내 기업 대상으로 밀던 ERP 사업을 최근 접고, 해외 시장을 타깃한 서비스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상자산 친화적 규제 환경을 갖춘 지역으로 아예 무대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넥슨의 블록체인 자회사 넥스페이스, 카카오의 블록체인 자회사 클레이튼과 라인넥스트의 핀시아가 합작한 카이아 DLT 재단 모두 아부다비에 거점을 마련했다. 국내 대표 블록체인 벤처캐피탈(VC)인 해시드도 아부다비에 진출하며 이 흐름에 동참했다. 아부다비는 명확한 규제 체계와 세금 혜택을 제공하며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들의 새로운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는 국내에서 가상자산 사업을 하려고 해도 가상자산 발행도 못하고, 스테이블코인 발행도 못하고, 토큰증권(STO)도 못하고, 현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서 “비트코인(BTC) 등 가상자산 현물 거래하는 거래소 외에는 사업 영역이 극히 제한적”이라면서 “숨통을 막아두고 있으니 기업들은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업계에서는 국내 1위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가 한국 블록체인 생태계 육성을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거래소 수수료를 통해 시장의 유동성이 대부분 업비트로 유입되고 있지만, 이렇게 흡수된 자금이 다시 시장에 환원돼 선순환을 이루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서 건강한 블록체인 생태계 조성을 위한 구조적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오후 3시 40분 코인게코 기준 업비트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일반 거래량 기준 약 73%, 정규화(Normalized) 거래량 기준으로도 약 50%에 달한다.
- 도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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