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무법지대에 방치돼 온 가상자산 상장과 관련, 최근 제도적 틀이 갖춰지는 모양새다. 대법원은 지난달 가상자산을 상장해주는 대가로 수십억원대 뒷돈을 받은 코인원 전 임직원에 대해 징역형을 확정하며 거래소 관계자의 ‘상장피(fee)’ 수수를 엄격히 처벌하는 판례를 정립했다. 가상자산 거래소 협의체 역시 기존 상장 가이드라인을 보완한 ‘가상자산 거래지원 모범사례’를 내놓으며 자율규제를 강화하는 모습이다. 다만 이용자보호법에 상장 관련 내용이 포함되지 않고 전적으로 업계 자율에 맡겨져 있어 한계가 여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최근 가상자산 상장을 대가로 뒷돈을 수수한 코인원 전 임직원 A씨, B씨에 대해 각각 4년과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상장피 등 상장 부정행위에 대해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판례를 확립한 셈이다. A씨와 B씨는 가상자산 상장 브로커들로부터 수십억원 상당의 가상자산과 현금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기소됐다. 이들에 대해 1심 재판부는 “가상자산은 이미 제도권 자산으로 편입됐다”며 “공공성에 비춰 거래소 상장에 대한 철저한 감시·관리가 요구되며 거래소상장 담당 직원에게 보다 엄격한 청렴성과 준법의식이 요구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난 2017년부터 물밑에서 공공연히 오갔던 상장피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지난 2020년이다. 당시 법원은 가상자산 재단으로부터 상장을 대가로 상장피를 받은 거래소 대표와 운영이사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거래소가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상장피가 법원에 의해 인정된 첫 번째 판례다. 재판부는 이들의 상장피 수취가 ‘특경법상 배임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봤다. 최근 실형을 확정받은 코인원 전 임직원들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혐의가 적용됐다. 특경법상 배임죄는 이득액이 5억 원 이상일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 원 이상일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가중처벌되는 등 처벌 수위가 매우 높은 범죄다. 권단 디케이엘파트너스 대표 변호사는 “업계 관행처럼 거래소 임직원이 상장브로커를 통해 상장피를 수취하던 것을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 대법원이 확정한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상장된 가상자산은 거래소가 제대로 평가해 상장한 가상자산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 일벌백계가 마땅한 사안이라 본다”고 짚었다.
국내 5대 원화 거래소가 소속된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DAXA·닥사)도 거래소의 가상자산 상장 심사에 대한 자율규제를 강화하며 발을 맞췄다. 닥사는 지난달 2일 금융당국과 함께 마련한 ‘가상자산 거래지원 모범사례’를 발표했다. 모범사례에 다르면 거래소는 분기마다 상장한 가상자산을 형식적, 질적으로 심사해야 한다. 심사 기준은 △발행 주체의 신뢰성 △이용자 보호 장치 △기술·보안 △법규 중수 등이다. 모범사례는 7월 19일 이용자보호법 시행과 함께 모든 거래소에 적용된다. 거래소들은 향후 6개월간 모범사례를 참고해 상장된 모든 가상자산을 재심사해야 한다.
이용자보호법을 통해서도 간접적인 불법 상장피 규제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금융당국은 이용자보호법 시행과 함께 시세조종 등 가상자산 시장 내 불공정거래행위를 본격 규제하기 시작했는데, 상장피 수취의 경우 시세조종과 연계된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가상자산 상장을 위해 거래소 담당자 또는 브로커에 상장피를 지불한 가상자산 재단은 이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상장된 가상자산에 대한 시세조종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가상자산 상장 규제가 강화된 효과는 즉각 나타나고 있다. 국내 거래소의 가상자산 신규 상장 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이용자보호법이 시행된 지난달 19일부터 약 2달간 국내 5대 원화 거래소에 신규 상장된 가상자산은 2종뿐이다. 빗썸이 지난달 23일 상장한 어베일(AVAIL)과 같은 날 코인원이 상장한 지케이링크(ZKL)가 전부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율규제 시도에도 상장 관련 규제를 법으로 명문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법원 판례나 상장 가이드라인 등으로 상장피 수수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관행을 근절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국내 한 소규모 가상자산 재단 관계자는 “최근에도 상장 브로커의 접촉은 많다”며 “특히 대형 거래소와의 직접 소통이 어려운 소규모 프로젝트를 노린 상장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전했다.
- 김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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