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선 암호화폐를 기초자산으로 한 다양한 파생상품이 등장했지만 국내에선 논의조차 시작되지 못한 실정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투자자 보호를 위해 금융당국이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한 장내 파생상품 출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 “비트코인 파생상품은 시기상조”
지난 달 26일 손병두 한국거래소(KRX) 이사장은 온라인으로 진행된 신년 기자 간담회에서 “비트코인을 포함한 가상자산이 제도권 자산으로 편입되지 않았다”며 “이런 상황에서 파생상품 기초자산으로 고려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그는 가상자산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부정적 시선도 내세웠다. 그는 “가상자산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부정적 기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섣불리 나서지 않겠다”면서도 “관련 수요는 인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장내 파생상품으로 투자자 선택지 넓혀줘야”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당국이 관련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철민 체인파트너스 대표는 “미국에선 암호화폐에 투자하려면 코인베이스 등 민간 거래소를 통할 수도 있지만 그레이스케일 상품을 살 수도 있다”며 “반면 국내에선 민간이 운영하는 암호화폐 거래소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지난 2일 업비트의 일일 암호화폐 거래액이 6조원을 넘긴 점을 문제 삼았다. 지난해 1월 코스피 일평균 거래대금은 6조 3,790억 원이다. 최근 개인투자자의 폭발적 관심이 몰리면서 올해 첫 달 26조원으로 증가했다. 업비트 한 거래소에서만 올해 코스피의 일평균 거래대금의 25% 수준이 거래된 셈이다. 표 대표는 “특정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거래소에서 6조원 이상 거래되는 상황은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투자자 보호 장치가 마련돼 있는 한국거래소에서 증권사와 함께 (암호화폐 관련) 장내상품을 출시해 투자자에게 선택지를 넓혀줘야 한다”며 “그게 한국거래소 역할”이라고 말했다.
권오훈 차앤권 법률사무소 파트너 변호사는 “홍콩을 비롯해 선진국에서는 암호화폐 자체 투자는 아니더라도 암호화폐를 기초상품으로 하는 파생, 펀드는 일정한 라이선스 하에 허용을 하고 있다”며 “공식적으로 정보를 검증할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금지하는 것은 특별한 법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정책적 판단인 것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해외 금융 선진국 사례를 못 따라가고 있다”며 “관련 논의가 더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대훈 SK 증권 연구원은 암호화폐 파생상품이 나오려면 국내에선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비트코인을 화폐로 볼지, 자산으로 볼지 등 개념에 대한 정의부터 정립이 돼야 다음 단계 논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해외에선 비트코인·이더리움 선물 출시, SEC 등록된 GBTC 거래도 활발
정부 눈치를 보느라 국내 시장은 위축돼 있는 반면 해외에선 암호화폐를 활용한 다양한 파생상품이 거래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17년 비트코인 선물 상품 거래를 허용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는 2017년 12월 비트코인 선물을 선보였다. 오는 8일에는 이더리움 선물 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뉴욕증권거래소(NYSE) 모회사 인터컨티넨탈익스체인지(ICE)의 백트(Bakkt)도 지난 2019년 비트코인 선물을 내놨다.
세계 최대 암호화폐 자산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이 운용하는 비트코인 트러스트(GBTC)는 기관투자자가 비트코인에 투자할 수 있는 활로를 열어줬다. GBTC는 비트코인 신탁으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SEC에 등록된 상품이다. 그레이스케일은 암호화폐 기반 투자 상품으로 지난해 4분기에만 33억 달러(3조 6,828억 원) 규모의 자금을 모집했다. 이처럼 기관 투자자 수요가 증가하면서 미국에선 올해 비트코인 ETF가 출시될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도예리 기자 yeri.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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