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을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세계 1·2위 달러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와 유에스디코인(USDC) 발행사가 잇달아 전용 블록체인 출시 계획을 내놓으면서다. 스테이블코인이 발행·유통되던 범용 블록체인이 가져가던 거래 수수료 수익을 발행사가 직접 확보하면서 동시에 실생활 결제와 규제 대응에 최적화된 자체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전략이다.
8일 디파이라마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15분 기준 스테이블코인 전체 시가총액은 3032억 달러(약 430조 2408억 원)로 집계됐다. 사상 처음으로 30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최근 한 달 새 6% 이상 증가한 결과다. 올 초 약 2052억 달러(약 291조 1788억 원)와 비교하면 불과 10개월 만에 48% 불어났다.
특히 올 3분기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블록체인 데이터 집계 사이트 RWA.xyz에 따르면 올 3분기 가상화폐 시장엔 총 456억 달러 상당의 스테이블코인이 유입됐다. 전 분기 대비 324% 급증한 수치다. USDT가 196억 달러(약 27조 8202억 원), USDC가 123억 달러(약 17조 4610억 원) 유입되며 성장세를 이끌었다.
급성장하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테더와 서클 등 주요 발행사는 물론 스테이블코인이 발행·유통되는 블록체인 인프라 사업자들에게도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개발하거나 운영하지 않더라도 해당 체인 위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발행·유통되는 것만으로 거래 수수료 수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쟁글 리서치에 따르면 저렴한 수수료와 빠른 속도를 앞세워 스테이블코인 거래에 주로 활용되는 레이어1 블록체인 트론(TRX)은 지난 1년간 36억 달러(약 5조 1145억 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리며 전체 블록체인 프로젝트 매출 1위를 차지했다. 트론에서 이뤄진 거래량의 약 99%는 USDT 거래에서 발생했다.
이에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도 직접 전용 블록체인 개발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테더 진영의 ‘스테이블(Stable)’ 체인이다. 테더가 공식적으로 개발사로 나선 것은 아니지만 같은 모회사를 둔 홍콩계 거래소 비트파이넥스가 주도해 2800만 달러(약 398억 원)를 투자 유치했으며 테더의 파올로 아르도이노 최고경영자(CEO)가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사실상 테더가 주도하는 블록체인으로 평가된다.
스테이블 체인의 가장 큰 특징은 거래 수수료를 별도의 토큰이 아니라 USDT 자체로 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존 블록체인인 트론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송금하려면 트론 블록체인의 자체 토큰인 TRX이 있어야만 수수료를 지불할 수 있지만 스테이블 체인에서는 전송하고자 하는 USDT만 보유하면 수수료까지 동시에 처리할 수 있어 훨씬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토큰 가격 변동에 따른 수수료 급등 위험도 없어 예측 가능한 비용으로 안정적인 결제가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이 실생활 결제에 쓰이려면 범용 블록체인보다 전용 블록체인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판단도 깔려있다. 초당 수만 건의 거래를 처리할 수 있는 비자(Visa) 등 기존 결제망과 달리 레이어1 블록체인의 거래 처리 속도는 현저히 느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체 USDT의 약 45%가 유통되는 이더리움의 경우 초당 처리 가능한 거래량은 최대 20건에 불과하다. 스테이블 체인은 스테이블코인의 결제·송금에 최적화된 거래 처리 과정을 통해 이 속도를 크게 개선하겠다는 구상이다.
스테이블코인 시총 2위 USDC 발행사 서클도 자체 전용 블록체인 ‘아크(Arc)'를 공개했다. 아크 체인 역시 수수료를 USDC로 지불하도록 설계됐다. 이외에도 규제기관의 요청에는 거래 내역을 제공하면서도 일반 거래에서는 이용자의 민감한 정보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제 맞춤형 프라이버시 보호 기능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국내 기업들도 스테이블코인 체인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국내 게임사 위메이드는 최근 스테이블코인 전용 체인 ‘스테이블원’을 내년 1분기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스테이블·아크와 마찬가지로 체인 위에서 발행될 스테이블코인을 수수료로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초당 3000건 이상의 거래를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설명이다.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는 9일 자체 개발한 이더리움 레이어2 블록체인 ‘기와(GIWA)’ 체인을 선보였다. 스테이블코인만을 위한 전용 체인은 아니지만 최근 한 식구가 된 네이버와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계약을 맺어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결제 업체 페이램은 최근 보고서에서 “범용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며 “결제 레일의 대이동은 이미 시작됐고 앞으로 10년간의 가치 전송 효율성은 이들 중 어떤 파트너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분석했다.
- 김정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