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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개론]<1>사이퍼펑크와 사토시 나카모토 찾기


최근 국내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했던 블록스트림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빌 스케넬은 로이터에서 20년 간 근무한 베테랑 기자 출신이다. 그에게 블록체인 산업에 투신한 계기를 묻자 그는 “저는 사이퍼펑크(Cypherpunk)거든요. 1990년 중반 부터 사이퍼 펑크 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기자로 근무할 때 주로 쓴 기사도 프라이버시를 주제로 한 기사였어요. 알다시피 블록체인은 모두 사이퍼펑크에서 시작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이퍼펑크는 암호를 뜻하는 사이퍼(cipher)에 저항을 의미하는 펑크(punk)를 붙인 합성어다. 무슨뜻일까. 위키리크스 운영자이자 스스로 사이퍼펑크이기도 한 줄리안 어산지는 그의 저서 ‘사이퍼펑크’에서 “사이퍼펑크란 대규모 감시와 검열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강력한 암호 기술을 대대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창하는 활동가를 말한다”고 정의했다.

암호학은 이전까지 주로 군사의 영역이었다. 적의 정보를 꿰뚫어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암호학을 활용했다면 사이퍼펑크는 온라인 공간에서 개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암호학을 사용했다.

어산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해방을 위한 최고의 도구였던 인터넷이 전체주의의 가장 위험한 조력자로 변신했다. 인터넷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

내가 공개하고 싶지 않은 정보마저 이런 저런 경로로 알려지고, 때로 절대 공개되지 않을 거라 믿었던 개인 정보가 인터넷에 3자에게 넘겨지는 경우가 실제 발생하기도 한다. 온라인 서비스 제공업체는 이용자의 모든 프라이버시를 장악하고 있다. 몇년 전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통해 오간 개인의 대화가 정부 사정·정보기관에 넘겨지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 텔레그램의 점유율이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페이스북 가입자 8,700만 명의 학력과 전화번호, 종교, 정치 성향 등의 정보가 외부에 넘겨졌다는 소식도 나왔다. 199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이퍼펑크의 문제의식은 2018년 오늘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만약 나의 정보를 암호화할 수 있다면? 네트워크에서의 활동을 암호화함으로써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다면? 사이퍼펑크는 이같은 화두를 바탕으로 다방면으로 활동을 뻗어나갔다. 그 가운데 한 분야가 바로 화폐와 거래에 관한 분야였다. 왜 일까. 온라인 시대로 접어들면서 프라이버시 측면에서 가장 취약해진 분야 중 하나가 바로 화폐였기 때문이다.

현금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내가 돈을 지급했는지, 얼마를 지급했는지, 상대방은 누군지, 언제, 어디서 지급했는지 현금에는 꼬리표가 없다. 반면 온라인 송금이나 신용카드 등은 송금시간, 액수, 상대방 등 모든 기록이 남는다. 노출하고 싶지 않더라도 누군가 알고자 한다면 공개될 수 밖에 없는 영역이 바로 온라인 거래다.

암호전문가이자 뉴욕대와 UC산타바바라 대학 교수 데이비드 차움은 1990년 익명의 가상화폐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그가 개발한 익명의 가상화폐 시스템의 이름은 디지캐시. 차움은 디지캐시에서 블라인드 서명, 암호화된 계좌, 이중지불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을 적용했다. 차움은 송신자와 수취인의 신원은 암호화하지만, 동시에 누구에게 보내는 지는 확실히 식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고자 했다. 비트코인과 유사한 아이디어다. 차움을 두고 일각에서 전자화폐의 시조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차움이 디지캐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취했던 접근법은 비트코인의 방식과는 달랐다. 비트코인은 모든 참여자가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운영하도록 한 반면, 차움은 은행에 디지캐시 라이센스를 판매하려 한 것으로 전해진다. 디지캐시는 1998년 파산했다.

비트코인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사이퍼펑크 활동가들. 왼쪽부터 데이비드 차움, 아담백, 닉재보, 할피니.

또 다른 사이퍼펑크 활동가이자 암호학자인 영국인 아담 백은 1997년 해시캐시라는 시스템을 들고 나왔다. 해시캐시는 블록체인에서 쓰는 작업증명(POW·Proof-of-Work)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해시캐시는 스팸메일 폭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POW 방식은 컴퓨터 연산능력을 사용해 특정한 값을 찾는 작업이다. 연산 능력이 필요한 만큼 비용과 시간이 든다. 아담 백은 이를 이용해 메일 발송자가 POW를 수행해야만 해시캐시 스탬프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해시캐시 스탬프가 찍히지 않은 메일은 보낼 수 없다. 이 말은 곧 메일을 발송하려면 어느 정도의 연산작업과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량의 정크메일을 보내려면 금전적, 시간적 비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스팸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을 만든 아담 백은 현재 블록스트림의 대표다. 블록스트림은 블록체인 기술, 특히 비트코인의 개선을 위해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이다. 사이퍼펑크에서 비트코인으로 활동영역을 확장한 대표적 사례다.

1990년 대 중반에 들자 은행 등 중앙기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화폐에 대한 구상이 속속 나왔다. 웨이 다이는 비머니(B-money) 라는 전자화폐 개념을 선보였다. 비머니는 POW를 사용한다거나, 거래기록을 담은 장부(원장)를 공유하고, POW를 수행한 이들에게 보상을 주는 등 현재 비트코인이 가진 특성을 상당 부문 제시했다. 웨이 다이는 이런 개념을 담아 백서를 발표했지만 실제로 론칭을 할 만큼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실제 시스템이 가동되지는 않았다. 다만 사토시 나카모토는 그의 비트코인 논문에서 웨이다이의 비머니를 참고 문헌 중 1번으로 언급하며 영감을 받았다는 점을 직접 알렸다.

이 외에도 할 피니는 POW 개념을 좀 더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닉 재보는 이를 기반으로 비트골드라는 디지털 화폐를 제안하기도 했다.

2009년에 이르러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 P2P 전자 화폐 시스템’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참고문헌을 포함해 총 9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논문이지만, 파장은 컸다. 2018년 4월 현재 시가총액은 약 145조 원에 이른다. 1,600여개의 암호화폐가 뒤따라 쏟아졌다.

블록체인이라는 개념도 비트코인에서 출발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논문 어디에도 블록체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비트코인의 소스 코드안에 있었다. 처음에는 블록과 체인을 띄워 썼다가 이후 붙어서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무엇이 앞선 전자화폐 들과 비트코인의 운명을 갈랐을까. 데이비드 차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비트코인과 이전의 암호화폐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디지캐시나 비-머니 등은 ‘블라인드 서명’같은 암호 기술을 접목한 전자 화폐일 뿐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암호화폐의 종류로 볼 수는 없다”며 “기존 기술을 비트코인이 차용했다 하더라도 비트코인은 완전히 다른 신기술”이라고 강조했다.

데이비트 차움의 디지캐시의 경우 두 사람 간의 거래에서는 시간 차를 이용해 거래 내용을 바꾸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여러 명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거래의 신뢰도를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송신인과 수신인을 암호화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은행이라는 중앙 기관이 없이 운용되지는 못했다.

웨이 다이의 비-머니는 개념으로만 존재했던 전자화폐였다. 웨이 다이가 발표한 비-머니 논문은 단 두 페이지로, 실제 화폐로 만들어 운용하기에는 구체적이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사토시 나카모토는 논문은 9페이지로 단출했으나 백서 발표와 동시에 실제 네트워크 구축에 돌입해 2010년 첫 거래를 성사시키며 현실성을 증명했다. 은행이 없이도 거래 조작이나 해킹없이 영원히 작동하는, 익명의 전자 화폐 시스템이 실제 나온 첫 번째 케이스가 바로 비트코인인 것이다.

시대 상황도 비트코인의 성공에 한 몫 거들었다. 비트코인이 탄생한 2009년의 세계 경제를 돌아보자.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 경제가 금융위기를 겪고 있었다. 경기가 급랭하자 세계 각국은 앞다퉈 금리를 낮추고 돈을 찍어냈다. 전 세계인들은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사들의 실패로 내가 가진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상황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미국 정부는 막대한 금융기관에 막대한 금융 구제를 실시했다. 위기를 유발한 금융기관은 도움을 받고 고통은 모두에게 넘겨지는 부조리였다. 영국의 정치학자 존 그레이는 이를 두고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이 사람들에게 어필했던 것은 비트코인을 이용하면 위태로운 글로벌 금융시스템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 기존 금융권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확산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 비트코인은 이같은 사회 경제 상황에서 기반을 넓혀갔다.

가장 극적인 상황은 키프로스에서 발생했다. 키프로스는 2013년 금융위기 여파로 국민들이 자신의 계좌에서 예금을 인출하는 ‘뱅크런’ 사태를 우려해 그해 4월 국민들의 계좌를 동결시켰다. 화폐를 발행하는 주체이자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정부와 은행은 언제든지 내가 가진 돈을 가져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사건을 두고 스위스의 블록체인 기업 멜론포트의 공동창업자 레토 트링클러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과연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은행이 관리하는 법정화폐와 비트코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안전하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 때 당시 비트코인의 시세가 이미 어느정도 말해준 듯 하다. 그 해 1월 20달러 수준이었던 비트코인 가격은 키프로스의 조치가 있던 4월 266달러로 13배 가량 뛰어올랐다.

사토시 나카모토도 전통 금융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커뮤니티에 올리기도 했다.

“(기존 화폐는) 중앙은행이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법정 화폐의 역사에는 이 믿음을 저버리는 사례로 충만하다. 은행도 신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맡긴 돈을 잘 보관하고 전달할 것이라는 신뢰. 그러나 은행들은 신용 버블이라는 흐름에서 함부로 대출했다.”

종종 비트코인 커뮤니티에 글을 통해 소통하던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후 2010년께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의 정체는 지금 이 순간까지 미궁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가 몇인지. 일부에서는 집단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초기에는 주사이퍼펑크 활동가들이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니냐는 의심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할 피니는 사토시 나카모토에게 비트코인을 전송받은 이다. 특히 이 거래는 비트코인의 시스템에서 발생한 첫 송금이라는 점에서 할 피니가 사토시 본인일 수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물론 본인은 부정했다. 또 사토시 나카모토는 그의 논문에서 웨이 다이의 비머니와 아담 백의 해시캐시는 참고문헌으로 언급했지만, 어쩐 일인지 비트코인의 조상격인 데이비드 차움의 디지캐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토시가 자신이 데이비드 차움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외한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기도 했다. 물론 차움 역시 부인 했다.

여전히 사토시의 정체는 미궁이지만 확실한 점은 이들 사이퍼펑크 활동가들이 일궈낸 암호학적 성과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재단을 설립하고 운영주체를 외부에 공개하는 최근의 블록체인 추세와는 달리 비트코인 진영의 개발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초기 비트코인 커뮤니티 활동가인 조규빈 새벽3시30분 대표는 이를 두고 “비트코인 진영의 개발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외부강연이나 대중매체에 나선 것을 본적이 있는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이퍼펑크와 맞닿아 있고, 탈중앙화를 외치며 등장한 비트코인의 철학을 고려하면 사실 누가 사토시인지는 비트코인 진영에서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는 모두 사토시다”라는 구호로 자신들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김흥록기자 rok@

김흥록 기자
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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