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장 조사기관 CB인사이트는 이달 초 발간한 보고서에서 블록체인이 헬스케어 산업에 새로운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일관된 데이터 저장 방식과 단순한 프로세스, 데이터 소유권 보장, 분산화 같은 블록체인의 속성에 의해 실현된다. 특히 블록체인의 분산원장 기술은 의료 산업에서 가장 강력한 규제를 받는 보안 이슈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병원, 보험사 등 이해관계자 사이의 데이터 교류를 가능케 하고, 데이터에 대한 고객의 권리를 강화한다. ‘고객 중심의 의료 비즈니스 모델’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헬스케어 산업에의 블록체인 기술 접목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국내외 대형 헬스케어 기업들이 블록체인 스타트업과 업무협약을 맺는 등 블록체인 기술 도입을 추진하지만 아직 기업 간 컨소시엄 구축이나 백오피스 업무 같은 단순 적용단계에 머물러 있다. 전문가들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직접 자신의 의료 데이터를 관리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초창기, 의료 컨소시엄 및 의약품 공급체인 구축=헤시드헬스(Hashed Health)는 미국의 의료관리 블록체인 컨소시엄을 선도하는 스타트업이다. 해시드헬스는 지난해 ‘일리노이 블록체인 이니셔티브(IBI)’와 업무협약을 맺고 의료 공급자 자격증 발급과 추적 업무를 간소화했다. 기존 프로세스에서 의료 공급자들은 자격증 발급을 위해 통상 30일에서 많게는 90일까지 소요되는 자격증명 과정을 각 기관 별로 거쳐야 했다. 해시드헬스는 블록체인에서 실행되는 자격증 등록 및 의료자격 정보 공유 시스템을 만들어 의료 서비스 제공자 네트워크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일관된 기록을 수집함으로써 자격증 발급 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현재 글로벌 헬스케어 익스체인지(Global Healthcare Exchange·GHX)와 컨설팅 기업 엑센츄어 등이 해시드헬스의 헬스케어 블록체인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블록체인 스타트업 크로니클드(Chronicled)는 지난해부터 공급망 컨설팅 기업 링크랩(LinkLab) 등 다수의 제약 및 유통망 업체와 메디레저(MediLedger)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메디레저는 약품의 생산부터 공급까지 유통 전 과정을 블록체인 네트워크 위에 올려 누가, 언제 제품과 접촉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의약품 공급체인 프로젝트다. 의약품 제조사가 제품에 시리얼 넘버를 부착해 각 의약품마다 고유의 ID를 부여함으로써 가짜약이 공급체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또 블록체인의 영지식 증명(Zero-knowledge proof·누군가 자신의 비밀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그 비밀정보를 안다는 것을 다른 이에게 알리는 기술)을 통해 기업들은 서로 의약품 데이터 원본을 공개하지 않고도 거래 유효성을 확인할 수 있다. 블록체인 공급 체인은 무선인식(RFID) 및 온도 조절 장치 등과도 연결돼 관계자들은 의약품 유통과정에서 필요한 환경적 요구사항들도 자연스레 준수하게 된다.
◇중장기 단계, 의료비 청구 간소화, 환자 데이터 권리 획득=미국의 IT기업 체인지헬스케어(Change Healthcare)는 이달 초 팁코 소프트웨어와 업무협약을 맺고 실시간 보험금 청구 시스템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체인지헬스케어는 의료 전반의 백오피스 업무가 느리고, 복잡하며 심지어 비싸기까지 한 것에 주목,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험금 심사 과정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했다. 일례로 미국의사협회(AMA)는 의료비 청구 및 보험 관련 비용이 총 국민건강 지출의 18%를 차지하고, 의료비 청구 사전 승인과정에 3일 이상이 소요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한편 의료 소프트웨어 개발 플랫폼을 제공하는 포킷독(Pokitdok)은 PC용 통합처리장치(APU) 시장의 강자인 인텔과 함께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한 의료비 승인 간소화 방안을 고안 중이다.
블록체인은 헬스케어 산업 관련자에게 의료 데이터를 수익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도 제공한다.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의료 소프트웨어 제공업체인 헬스베리티(HealthVerity)는 데이터 소유자에게 정보에 대한 허가 및 접속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제 3자의 역할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이는 암이나 희귀병 같이 환자 본인이 자신의 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곳에서 더욱 활발하게 일어난다. 헬스베리티는 환자를 대상으로 데이터 수집 및 동의 과정을 거쳐 이를 필요로 하는 의료 기관들에 전달함으로써 개인정보보호법을 지키면서도 미들맨을 없애고 있다.
이밖에 루나디엔에이(Luna DNA)는 환자에게 유전체 데이터에 대한 접근 권한을 부여하는 데이터 인센티브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독에이아이(Doc.ai)는 블록체인 네트워크 참가자들이 토큰을 통해 데이터를 사고팔 수 있는 의료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최종 목표, 환자 신원 및 의료 기록의 보편적 활용=블록체인 기술은 의료 데이터의 완전한 탈중앙화와 함께 환자 개개인이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환자 의료 기록의 공공 신원 확보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의료 데이터를 수익화하는 단계까지 도달한다. 기존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의료비 중복 지불과 해킹 위협도 자연스레 해결된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여러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전자건강기록(EHR) 시스템 범위에서 벗어난 데이터 관련 규정이 보다 명확해야 하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안전하게 저장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다. 일례로 최근 에스토니아와 인도는 공공 의료 데이터 식별자 확보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시민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우려의 시선도 받고 있다.
/김소라기자 srk@decenter.kr
- 김소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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