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공동 마케팅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그룹 본사 차원에서 선을 긋고 있습니다. 언론에 암호화폐와 함께 기업명이 노출되는 게 꺼려지는 모양이에요. 저희와 협업하기로 했던 대기업의 자회사 팀도 난감해졌죠.”
블록체인 프로젝트 담당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얼마 전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대기업과 마케팅을 진행한다고 밝혀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팀이었다. 현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담당자는 ‘현대판 홍길동’이라 답했다. “기업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게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황 같다고 해야 할까요?”
최근 크립토 업계에선 대기업과 블록체인 프로젝트 간 업무 협약을 두고 벌어지는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는다. 이는 두 주체가 하나의 업무협약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으로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 이해상충의 결과다.
대기업은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독려, 암호화폐는 규제’라는 정부의 기조를 따라야 하므로 암호화폐를 전면에 내세우긴 어렵다. 반면 프로젝트 팀은 대기업과의 협업 호재를 가격 상승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불투명한 규제와 더불어 서비스 상용화가 점점 더뎌지고 있는 프로젝트 입장에선 협업 호재가 당장 동력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입장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우리나라 블록체인 생태계가 더디게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산업과 기술이 성장하기 위해선 기업의 자본력이라는 마중물과 스타트업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업-프로젝트 간 MOU가 기술·개발 협력으로 이어져 블록체인 산업의 근본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 불협화음으로만 남는다면 인공지능(AI)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블록체인 산업도 다른 국가에 밀릴 수밖에 없다.
결국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이분법적으로 나눠서만 보려는 정부의 기조부터 달라져야 한다. 전문가들은 활용에 제약이 있는 허가형 블록체인보다 이더리움, 이오스 같은 개방형 블록체인이 향후 더 높은 가치를 갖게 될 것이라 전망한다. 그리고 개방형 블록체인은 노드를 유지하기 위한 적정한 보상을 필요로 한다. 보상을 반드시 암호화폐로만 제공할 필요는 없지만, 통용화폐의 가치를 갖는 암호화폐가 참여자를 유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은 분명하다.
암호화폐를 향한 정부의 규제가 분명해진다면 대기업들도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설 수 있다. 그땐 기업-프로젝트 간 MOU가 암호화폐를 가운데 두고 벌이는 눈치싸움이 아닌, 신뢰를 기반으로 전에 없던 가치를 창출하는 ‘가치의 인터넷’ 블록체인에 한층 더 가까워진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조재석기자 cho@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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