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A 씨는 가상자산 예치·운용 서비스 업체인 ‘델리오’가 연 10% 이자로 자산을 불려준다는 말에 비트코인을 맡겼다. 델리오는 이렇게 모은 코인 일부를 연 12% 이자를 쳐주는 동종 업체 ‘하루인베스트먼트’에 예치했다. 하루인베 역시 고객들에게 받은 자산 일부를 코인 운용사 ‘비엔에스홀딩스(B&S)’에 위탁했다.
이달 13일과 14일 국내 가상자산 예치 업체들이 잇따라 ‘입출금 중단’을 선언하며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위기에 빠진 배경이다. 고금리의 달콤한 유혹 뒤에는 마지막 업체가 수익을 못 낼 경우 사슬 속 모두가 유동성 위기에 빠지는 ‘시한폭탄’이 숨어 있었다. 문제는 현행법이나 논의 중인 가상자산법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 생겨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코인이 델리오나 하루인베 등 예치 사업자에 맡겨진 이후의 흐름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사업자들이 이 돈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치금을 회삿돈과 섞거나 기존 고객에게 줄 이자를 신규 예치금으로 돌려막기를 해도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업계에서 수익률이 높다고 소문난 가상자산 운용사 B&S는 하루인베뿐 아니라 국내 코인 업계 ‘큰손’들의 자산을 맡아 굴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2주 전부터 B&S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고, 하루인베가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루인베가 B&S에 소송을 제기했고 델리오도 ‘일시적인 입출금 중단’을 강조하며 정상화 의지를 밝혔지만 B&S에서 구멍 난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이상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을 보이며 제도 공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자본시장법 내에서 시중 금융기관이 예치 자금을 다른 기관에 재위탁할 경우 당국의 엄격한 관리를 받는 것과 달리 현행법상 가상자산 예치 사업자의 영업 행태나 자금 관리 등을 규율할 어떤 제도적 근거가 없다. 현재 가상자산 업계를 다루는 유일한 규정은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상 가상자산사업자(VASP) 신고제다. 심지어 하루인베의 경우 신고 수리를 거치지 않아 애초에 정부로부터 어떤 감독도 받지 않았다. 델리오는 VASP로 등록했지만 별반 차이는 없다.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 관계자는 “특금법은 자금세탁 방지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델리오의) 투자 방식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가상자산 시장 최초의 업권법인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4월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를 거쳐 법제사법위원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해당 법으로도 이번과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없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지난해 11월 세계 4위 가상자산거래소 FTX의 파산으로 자산 위탁 운용 문제가 불거졌지만 관련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계류 중인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안에 가상자산 투자업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가 되풀이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21년 특금법 시행부터 예치 서비스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당국과 국회 모두 손을 놓았다”고 꼬집었다.
- 조윤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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