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혁신성장 관계장관 회의에서 “빅데이터·블록체인·공유경제와 인공지능(AI), 수소경제 등 3대 전략투자분야에 5년간 9조~1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올 들어 정부가 지원한 블록체인 연구 규모도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었고, 연말까지 추정하면 지난해 보다 3배 가량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예산을 늘리겠다”, “블록체인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등 장미빛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대한민국 블록체인 산업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말로는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미래의 새로운 먹거리로 투자하겠다고 하지만, ‘암호화폐 규제’와 ‘블록체인 활성화’라는 이분법의 ‘투트랙’(two-track) 정책을 고수하면 ‘절반의 성공’도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블록체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책을 수립하는지 의심스럽다’는 회의적 시각과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렇다면 정부의 투트랙 정책이 반쪽짜리도 못 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블록체인이 주류에서 벗어난, 대중성과 확장성이 제한된 ‘프라이빗 블록체인’만을 놓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우선 블록체인은 크게 퍼블릭 블록체인(Public Blockchain)과 프라이빗 블록체인(Private Blockchain)으로 나눌 수 있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모두에게 개방된 공개형 블록체인으로 별다른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비트코인(BTC)과 이더리움(ETH)이 퍼블릭 블록체인의 대표주자다.
퍼블릭 블록체인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인센티브’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래서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에 대한 대가,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암호화폐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데 도움을 준 참여자들에게 인센티브로 주어진다. 비트코인 커뮤니티에서도 비트코인 거래를 확인하고 기록하는 작업, 채굴에 참여한 것에 대한 보상(작업증명방식·PoW)으로 수수료와 비트코인을 준다. 이더리움도 마찬가지다. 다른 모든 퍼블릭 체인도 암호화폐라는 인센티브를 통해 불특정 다수가 자발적으로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거래의 투명성’과 ‘네트워크 효과’를 유지한다.
반면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폐쇄형 블록체인’이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인증을 통해 검증받은 사람만 네트워크 참여할 수 있다. 보통 하나의 기관 또는 기업에서 특수하게 만들고 허가받은 사람만 커뮤니티 참여를 허락한다.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중앙 기관이 모든 걸 결정하고 관리한다. 불특정 다수를 끌어들여 네트워크를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 생태계를 운영하기 위한 ‘인센티브’로써의 암호화폐도 필요 없다. 수정 혹은 검증에 대한 권한도 승인기관이 단독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프라이빗 체인은 퍼블릭 체인에 비해 거래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진행 중인 블록체인 프로젝트, 대중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프로젝트는 대부분 퍼블릭 체인을 쓴다. 프라이빗 체인은 자체적으로 개발비를 조달할 수 있는 대기업과 금융회사 등에서 자체 서비스를 위해 연구하고 있다.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암호화폐 없는 블록체인’은 결국 프라이빗 체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면서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앱)을 보면 정부나 대기업에서 만든 앱보다 스타트업이나 IT 기업에서 만든 것이 훨씬 더 많다. 스타트업들이 만들고자 하는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앱은 대부분 퍼블릭 체인 위에 올라간다. 그리고 서비스 개발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이 ICO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암호화폐라면 노이로제에 걸린 듯 경기를 일으키면서 ‘반(反) 암호화폐 정책’을 고집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을 지난해 연말로 되돌려야 한다. 당시 모든 국민이 암호화폐라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다. 2017년 1월 100만원 안팎이던 1 비트코인(1 BTC) 가격이 10개월 후에는 700만원, 12월 초에는 2,500만원까지 급등했다. 그러다 이틀 만에 1,500만원으로 폭락했다.
가격이 급등락하는 과정에서 “아무개가 암호화폐로 떼돈을 벌었다더라”, “일반 직장인이 강남 건물주가 됐더라” 등 ‘전설’ 같은 소문들이 무성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빚내서 투자했다가 쪽박 찼다”, “졸업 때까지 필요한 등록금 다 날렸다”, “전세자금 투자했다가 월세도 못 내게 생겼다” 는 등 안타까운 얘기가 크게 늘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정부는 투기판이 된 암호화폐 시장에 구두경고를 날리면서 ‘암호화폐 거래소 전면 폐쇄’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그러다 “거래소 폐쇄는 과하다”는 여론에 밀려 ‘거래 실명제’를 도입했고, “암호화폐를 악용한 불법적 해외송금과 자금세탁 등의 금융 범죄를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신규 투자자들의 계좌개설이 힘들어졌고, 과열된 분위기가 식으면서 암호화폐 가격은 하락 추세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암호화폐 투기에 놀란 정부의 가슴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고, 암호화폐에 대한 정부의 트라우마도 여전한 상태다.
한국은 ICO(암호화폐공개)가 금지된 나라다. 전 세계에서 ICO를 명시적으로 금지한 나라는 한국과 중국 두 곳뿐이다. ‘ICO 금지’는 스타트업들이 블록체인 기반의 서비스를 개발하겠다는 ‘퍼블릭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막고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 다른 국가들은 ICO와 블록체인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가장 적극적으로 ICO를 장려하는 국가로는 스위스와 에스토니아가 꼽힌다. 스위스는 낮은 세금과 최소한의 규제로 ICO를 활발히 지원하면서 정부 차원의 행정 지원까지 제공한다.
에스토니아는 2012년부터 블록체인 기술을 국가 행정서비스에 적용할 정도로 블록체인 기술에 개방적이다. 에스토니아 전자시민권(e-Residency) 제도로 외국인도 쉽게 온라인으로 법인을 설립할 수 있다. 가상화폐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부과하지 않아 ICO 모금단계에서 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어 ICO를 하려는 다수의 기업이 에스토니아를 찾는다.
미국은 ICO에 대해 비교적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기업공개(IPO)와 같은 수준의 규제를 따르면 제도권 내에서 ICO가 가능하도록 물꼬를 열어뒀다. 지난 6월 제이 클레이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이 “ICO를 증권법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히면서 ‘ICO 금지’ 대신에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맞췄다. 가까운 일본은 ICO에 대한 별다른 규제가 없다.
암호화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규제를 철회하고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국가들도 하나둘 나타났다.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다. 초기에는 암호화폐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암호화폐 거래에 대한 세금을 60% 감면하고, ICO 지원제도를 마련했다. 프랑스 금융규제 당국인 금융시장국(AMF)은 ICO 기업에 대한 사전검토를 통해 투자자를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인도는 가상화폐 전면 금지 조치로 기울었다가 암호화폐를 ‘통화’가 아닌 ‘상품’으로 규정하고 허용하는 방향의 규제안을 마련해 다음 달 중 발표할 예정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정책의 불확실성만 커졌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180도 다른 규제방향에 기업들은 불안감만 크다. 중앙정부는 ‘ICO 금지’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크립토 아일랜드’ 비전을 선포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앞다퉈 암호화폐 도입을 발표하면서 중앙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원 지사가 제시한 ‘제주 글로벌 블록체인 허브 도시 구축 프로젝트’는 제주를 블록체인 특구로 지정해 블록체인·암호화폐 관련 기업의 활동을 보장하고, 해외 ICO를 통해 제주코인을 발행하겠다는 것이다. 제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지역 화폐 발행에 적극적이다. 이미 서울 노원구에서는 지역구 내에서 자원봉사, 기부 등과 같은 일을 할 때 사용이 적합한 지역화폐 ‘노원(NW)’을 출시했다. 세종시도 코인 기반 생태계를 구축하는 등 중앙정부와 차별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처럼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입장 차이가 커지면서 블록체인 산업계는 혼돈 속에서 적극적 투자와 참여를 주저하고 있다.
물론 암호화폐 투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문제는 ‘규제를 위한 규제’가 아닌 규제의 지향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ICO가 투기나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며 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라는 옛말처럼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책 방향이다.
지금처럼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금지’라는 식의 정책은 국내 블록체인 기업들을 해외로 내몰 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의 국내 진입까지 막고 있다. 블록체인 시장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고 있는 형국으로 제주코인을 발행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야 하는 코메디 같은 상황이다.
블록체인 초기 시장을 선점하고 글로벌 기술경쟁력 확보를 위해선 반드시 ‘선 성장, 후 규제’의 네거티브 규제방식으로 전환이 시급히 필요하다. 또 스위스, 싱가포르 같이 ICO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제도권 안에서 문제점을 관리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정부가 주장하는 블록체인 산업의 성장과 건강한 생태계 구축이 가능하다. /이화여대 융합보안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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