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가 서방의 경제 제재를 회피할 수단으로 암호화폐를 악용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암호화폐 업계는 아직 소규모에 불과한 암호화폐 시장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크지 않다며 규제 강화에 반발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22일(현지 시간) 국제결제은행(BIS)이 주최한 가상 회의에서 “러시아에서 루블화를 암호화폐 또는 스테이블 코인으로 전환하려는 조짐이 파악됐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루블화의 전환 규모가 1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은 암호화폐가 서방의 대러 제재에 대한 우회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유럽연합(EU) 측도 암호화폐 등 가상자산이 EU 규제 대상에 해당한다는 입장이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지난 9일 러시아와 ‘친(親) 러' 국가인 벨라루스에 부과한 경제 제재에 암호화폐를 포함한 바 있다. 파비오 파네타 ECB 정책이사도 이날 “암호화폐는 금융 시스템의 허점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며 규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암호화폐의 악용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블록체인 분석 기업 체이널리시스의 공동 창업가인 조나단 레빈을 비롯해 여러 암호화폐 전문가들은 최근 미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암호화폐 시장은 러시아 측의 대규모 제재 우회에 이용되기에는 아직 소규모”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암호화폐 데이터 회사인 카이코에 따르면 지난 22일 현재 국제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거래된 루블화 표시 비트코인, 미국 달러 표시 스테이블 코인의 합계는 총 900만달러 미만이었다. 글로벌 암호화폐 시장에서 비트코인의 일일 평균 거래량이 200억~400억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비중이 미미하다는 의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ECB가 러시아의 제재 회피 수단으로 암호화폐가 실제 쓰였는지 확인했는지는 불명확하다”고 평가했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바이낸스를 비롯해 다른 대형 거래소들 역시 여전히 러시아 암호화폐 거래를 취급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 장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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