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시장에서 기축통화 역할을 하는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에 상승장이 이어지며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 규모는 처음으로 2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대신 스테이블코인을 지지하면서 달러와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고 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시작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글로벌 흐름에 발맞춰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블록체인 데이터 플랫폼 디파이라마에 따르면 이달 13일 기준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021억 달러(약 289조 6497억 원)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지난달 초 미국 대선 이후 한 달 만에 약 16% 급증했다. 가상자산 투자가 활발해지며 기축통화 역할을 하는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가상자산 거래가 주로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이뤄진다. 업비트나 빗썸 등 중앙화된 거래소에서 원화로 가상자산을 거래하는 국내와 다르다. 이에 따라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이 커지는 현상은 가상자산 투자가 활성화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스테이블코인은 가치가 고정된 가상자산이다. 거래 수수료가 저렴하고 거래 시 별도의 중개자를 거치지 않아도 돼 국경 간 거래에 용이하다. 보편적 형태는 미국 달러와 일대일로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다. 테더(USDT), 유에스디코인(USDC) 등이 대표적이다. USDT의 스테이블코인 시장점유율은 70%, USDC는 20%로 미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전체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은 각국 규제에 따라 준비금 감사를 받는다. 최근에는 전통 금융사도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뛰어들고 있다. 글로벌 결제 서비스 기업 페이팔은 지난해 8월 스테이블코인 페이팔USD(PYUSD)를 발행해 사용자가 상품·서비스 결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스탠다드차타드와 조디아마켓은 최근 보고서에서 “차기 트럼프 정부에서 규제가 명확해지면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현재보다 10배 이상 커질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가상자산 거래 규모 성장과 더불어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정부 차원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육성하겠다고 공언함에 따라 영향력은 더 커지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CBDC를 반대한다. 대신 달러 패권 유지를 위한 대안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밀고 있다. 주요 스테이블코인 준비 자산 대부분이 미 국채로 이뤄져 있어 스테이블코인 확대가 미 국채 매입을 촉진하고 달러 지배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트럼프 당선인은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와 차남 에릭이 주도하는 디파이 프로토콜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을 통해 자체 스테이블 코인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USDT 관리 기관인 캔터피츠제럴드의 최고경영자(CEO) 하워드 러트닉을 차기 상무장관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윤창배 업비트 투자자보호센터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대규모 재정적자가 지속되면서 미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 스테이블코인은 이를 구매해주는 주요 고객이 된다”며 “최근 금리 인하와 맞물려 중국 등 채권 보유국의 매도세가 지속되고 있어 스테이블코인의 미 국채 보유 확대는 미국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 대응해 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국도 자국 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힘을 쏟고 있다.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통화 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지난해부터 스테이블코인 제도를 시행하고 있고 홍콩도 이달 초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 초안을 공개했다. 싱가포르 통화청(MAS) 지급 결제법에 따라 공인된 스테이블코인인 XSGD는 그랩 등 현지 서비스에서 이미 사용이 가능하다. 타이거리서치는 “스테이블코인은 외환시장 변동성이 커지는 시기에 대외경제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며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을 제한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오면서 아시아 각국 정부는 스테이블코인 정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한국은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올 10월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국환거래법을 개정해 스테이블코인 규제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구상 단계에 머물고 있다. 관련 제도를 마련해 양성화하려는 글로벌 흐름과 달리 아직 구체적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은 셈이다. 당국의 부정적 시각에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전무한 상태다. 한국은 대신 규제 샌드박스 등을 통해 CBDC 연구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한국이 트럼프 당선 이후 불붙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패권 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서준 해시드 대표는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해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한국은 제도 부재로 국내 가상자산 업계가 사업 시도조차 포기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 김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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