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비트코인 광풍을 겪고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국내 암호화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 22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가상화폐거래소 폐쇄’ 발언을 듣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3년 전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할 당시에도 정부는 ‘암호화폐 금지법 도입’, ‘거래소 폐쇄 목표’ 등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시장에 충격을 줬다. 암호화폐를 자금세탁, 투기 등의 수단으로만 볼 뿐 투자자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 마련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가상화폐 TF 주무부처인 국무조정실의 관계자는 "정부 공식 입장은 암호화폐를 위한 별도의 제도화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며 “가격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투자들이 알아서 유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암호화폐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경직돼 있다고 지적한다.권오훈 차앤권 법률사무소 파트너 변호사는 “암호화폐 중 일부는 투자성이 있기 때문에 금융투자상품으로 보고, 이에 준하는 보호가 필요하다”면서 “미국도 일반적으로 암호화폐를 금융투자상품으로 보고 있고, 코인을 발행해 공모할 경우 규제 당국에 신고하는 절차를 거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암호화폐를 금융투자상품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투자자 보호에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미국은 가상자산(암호화폐) 발행은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연방법 차원에서 규제하고, 유통시장은 개별주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SEC는 증권거래법상의 '투자계약' 개념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대다수의 증권규제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역시 가상자산이 상품거래소법 상의 상품에 해당한다고 본다. 암호화폐를 투기자산으로 보고 엄포만 놓는 한국 정부와 달리 제도권으로 편입하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뉴욕주는 2015년 세계 최초로 가상자산 특화 법률인 '비트 라이선스(BitLicense)를 제정해 이용자 보호, 공시의무, 불법자금세탁행위 예방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제하고 있다. 워싱턴주의 규제는 가상자산 취급업소에 기존 자금송금업법을 유추해 적용하는 방식이다.
일본 역시 많은 논의 끝에 가상자산을 지불수단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가상자산 교환업자에 대해서는 라이선스(면허)를 발급하고 있으며, 작년 7월 기준으로 등록된 가상자산 사업자는 24곳이다. 가상자산으로 상장하려면 금융청의 사전 심사를 거쳐야 한다. 새 가상자산 취급 등 변경사항은 사전신고를 의무화했으며, 업계 자율규제도 병행하고 있다. 일본가상자산거래업협회(JVCEA)라는 단체가 가상자산 교환업자의 규율 위반 시 주의나 경고, 회원 제명 등을 할 수 있다.
프랑스도 가상자산에 우호적이다. 프랑스는 2019년 4월부터 기업성장변화법을 시행, 가상자산 발행과 유통을 규제하고 있다. 독일은 '지급수단으로 가상자산을 사용하는 것은 규제대상 행위가 아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상자산의 발행, 채굴, 거래 등을 금지하는 법령은 없다.다만 가상자산은 은행법상 금융투자상품에 해당하며 가상자산의 판매자(투자중개인)에 대해서는 인가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다르다. 현재 유일한 암호화폐 관련 법안인 ‘특정 금융거래법(특금법)'을 살펴봐도 투자자 보호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크코인(가장자산 이전 시 전송기록이 식별될 수 없도록 하는 기술이 내재된 코인)에 대한 취급 금지 내용만 담겨있을 뿐, 기타 코인들에 대한 상장 제한 규정, 공시 규정등은 전무하다. 특금법이 주로 암호화폐가 자금세탁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거래소 운영자가 형법상 범죄를 저지른 이력이 있어도 버젓이 거래소를 운영할 수 있다. 특금법은 거래소 신고 거부 사유로 금융관계법률 위반 여부만 따지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관련 범죄자들이 대부분 형법상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 사전자기록위작 등으로 기소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법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셈이다. 금융당국은 금융관계법률을 위반하더라도 특금법 시행일(3월 25일) 이전에 전에 저지른 위법행위에 대해선 면제부를 줬다. 업계 관계자는 “특금법이 자금세탁 방지에 중점을 둔 법안이라고 해도 투자자에게 피해를 준 전력이 있는 사람이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하는 것은 막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부처 컨트롤 타워인 기획재정부도 비슷한 입장이다. 내년 1월부터 암호화폐의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투자자 보호는 남의 부처일로 여기는 분위기다.
정부 부처들이 제 잇속만 챙기는 사이 투자자들의 피해는 늘고 있다.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규제의 사각지대를 악용해 검증되지 않는 코인을 상장했다가 폐지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거래소 입장에선 상장돼 있는 코인이 많을수록 거래 수수료 이익을 높일 수 있다. 제대로 된 검증없이 무분별하게 상장이 이뤄지는 까닭이다. 피해는 오롯이 투자자 몫이다. 거래소를 믿고 아무 코인에 투자했다가 특정 세력의 시세조작 등으로 낭패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들 코인처럼 특정 거래소에만 상장돼 있을 경우 문제는 더 커진다. 특금법에 따라 가상자산 사업자는 오는 9월 24일까지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획득,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계좌 발급 등 요건을 갖추고 신고를 완료해야 한다. 만약 특정 코인이 유일하게 상장돼 있는 거래소가 가상자산사업자로 등록하지 못할 경우, 해당 코인은 휴짓조각이 되버린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특금법 자체는 돈 세탁 방지, 테러자금 차단에 목적이 있다”며 “코인에 대한 위험성, 투명성 등은 업권법이 규율할 부분인데 아직은 (관련 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는 업권법이 없기 때문에 이용자를 기망할 목적이 있는 프로젝트를 발견했다면 민간 부문에서 사법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규제 공백 우려가 커지자 지난 13일 이정문 더불어민주당 의원(충남 천안병, 정무위)은 암호화폐 관련 범죄자의 시장 진입을 제한하기 위한 특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암호화폐 투자자 보호책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이정문 의원실 관계자는 “특금법은 금융위 소관 법률이기 때문에 금융위가 책임을 지고 주무 부처로써 제도 마련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금법도 이제 막 시행됐기 때문에 여러 규제를 넣다 보면 반대급부로 신사업 발목을 잡는다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면서 “업계에 자율성을 주는 만큼 책임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예리 기자 yeri.do@
- 도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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