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서로가 지켜야 하는 약속, 규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라마다 규제를 두는데, 방식에 따라 크게 ‘포지티브 규제’와 ‘네거티브 규제’로 나눈다.
포지티브(positive)는 의미나 어감이 긍정적이다. 이에 반해 네거티브(negative)는 부정적 의미에 어감도 부정적이다.
그런데 포지티브와 네거티브가 규제를 만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포지티브 규제’는 할 수 있는 것들만 나열하고, 언급되지 않은 모든 것을 금지하는 방식이다. 할 수 있는 것을 열거했다고 해서 ‘열거주의’라고 한다. 반면 ‘네거티브 규제’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것을 허용하되 절대 안 되는 예외사항만 명시해 금지하는 방식이다. 원칙적으로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포괄주의’라고 말한다.
이처럼 포지티브와 네거티브가 규제와 엮이면 단어 자체가 갖는 태생적 의미 때문에 헷갈리거나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 의미를 갖는 네거티브가 ‘억제’를 의미하는 ‘규제’와 만나 ‘긍정’의 의미가 된다. 부정과 부정이 만나 긍정이 되는 셈이다. 반대로 긍정을 의미하는 포지티브는 부정적인 규제와 만나 부정의 의미로 바뀌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나타난다.
포지티브·네거티브 규제는 일상생활 곳곳에 녹아 있다.
교통 표지판이 대표적 사례다. 한국은 비보호 좌회전이나 유턴은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만 허용된다. 가능한 곳만 표시하는 포지티브 규제 상황에서는 표지판이 없는 곳에서 좌회전이나 유턴을 하면 안 된다. 이에 반해 미국은 모든 곳에서 좌회전이나 유턴이 가능하다.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예외적으로 금지하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에서는 안 되는 곳만 금지 표지판을 세워두기 때문에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유턴을 하면 불법이 된다.
운전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운전하다가 유턴을 한다는 것은 가던 길과 정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려던 목적지가 반대방향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언젠가는 유턴을 해야 하고, 빠를수록 좋다.
만약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이 없고 유턴이 가능한 도로를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길을 잘못 들었거나 반대편에 목적지가 있어서 유턴을 해야 한다고 하자. 포지티브 규제에서는 유턴 표지판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가야 한다. 혹은 신호등이 있다면 앞에서 오는 차가 없어도 신호가 켜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효율적 방법은 아니다. 같은 차선의 교통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고, 시간도 낭비된다. 그런데 네거티브 규제에서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이 없는지 확인한 후 유턴하면 된다. 물론 앞에서 차가 오고 있는데도 유턴을 하는 경우는 네거티브 규제를 잘못 해석한 운전자가 자초한 사고다.
효율성 측면만 놓고 봐도 포지티브 규제와 네거티브 규제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분명하다. 물론 전제 조건은 있다. 스스로 질서를 지키겠다는 성숙된 시민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만 합리적 규제가 가능하다. 만약 사회 구성원의 역량이 부족해 자율에 맡길 수 없을 때는 타율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 이유로 선진국은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은 포지티브 규제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눈을 돌려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자. 전 세계 기업들은 기술 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IT와 신산업 분야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등장한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포지티브 규제는 시대 흐름을 거스르며 갈 길 바쁜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시대 흐름에 역주행 하는 규제 사례는 넘쳐난다. 보유한 차가 한 대도 없지만, 세계 최대의 운수업자로 성장한 우버는 한국에선 불법이다. 보유한 객실 하나 없이도 세계 최대 숙박업체로 성장한 에어비앤비도 한국에선 불법이다. 미국에서 P2P(개인간거래) 대출로 나스닥에 상장한 렌딩클럽도 한국에서 서비스를 하려면 대부업자로 등록해야 한다. 대부업이라고 하면 어감상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꽉 막힌 규제의 틀 안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무리수가 따른다.
가장 심각한 분야는 블록체인 산업이다. 새롭게 등장한 기술로 ‘근본도 없는 불법’으로 치부된다. 현재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진행하는 ICO(Initial Coin Offering·암호화폐공개)가 불법이다. 정부는 명백하게 “불법”이라고 선을 그어놓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된다’, ‘안 된다’의 논쟁이 치열하다. ‘일단 선부터 긋고 보자’는 정부의 선택이 초래한 혼란이다.
물론 새롭게 등장한 기술로 만든 서비스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문제는 규제를 엄격하게 한다고 해서 모든 피해가 완벽하게 예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옛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라는 말이 있다. “낮은 확률이지만 피해가 있을 수 있으니 무조건 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일단 일을 시작한 후에 발생하는 문제를 차분히 보완해 나가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중국 정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로 대표되는 중국의 신산업 육성정책은 “일단 새로운 서비스를 허용하고, 문제점은 보완한다”는 기조를 갖고 있다. 우리도 중국 정부의 이런 시각이 초연결 사회를 지향하는 21세기에 적합한 규제 방식은 아닌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최근 통계청이 ‘블록체인 기술’ 분류체계에 대한 의견수렴 일정을 밝히고 블록체인 기술 산업분류 고시를 예고했다. 분류도 없이, 무법 세계의 안개 속에 있던 블록체인을 산업으로서 공표하게 됐다는 게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대한민국은 국민 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접어들었다. 국민들도 선진국 수준의 성숙된 시민 의식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만큼 정부도 블록체인 등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규제 만큼은 성숙된 시민의식에 맞게 ‘네거티브 규제’로 서둘러 전환해야 한다.
- 우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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