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이란 말이 번진 건 지난 2014년 땅콩 회항 사건 때다. 당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견과류 간식 제공에 문제를 제기하며 승무원과 사무장을 질책하고, 비행기를 돌리게 했다. 언뜻 보면 부하 직원에 대한 갑질 같지만 본질은 고객에 대한 갑질이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 250명은 영문도 모른 채 일정 지연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조금 다른 형태의 갑질이 이슈가 됐다. 2016년 미스터피자 갑질 사태 때다. 정우현 전 MP그룹 회장 일가는 치즈 유통 과정에 친인척을 개입시킨 뒤 가맹점 점주들이 치즈를 더 비싼 가격에 사게끔 했다. 사업 성공 여부가 본사에 달려 있는 점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치즈 가격을 부담했다.
2019년 블록체인 업계에선 위 두 가지 사례가 혼합된 형태의 갑질이 일어나고 있다. 고객은 암호화폐 투자자이고 가맹점 점주는 블록체인 기업이다. 이들에게 ‘갑’은 암호화폐 거래소다.
우선 고객에 대한 거래소의 갑질은 꽤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거래소들은 서버 과부하나 해커 공격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투자자들에게 전가하곤 했다. 갑작스러운 서버 장애로 재산 피해를 입었다는 투자자들에겐 그 어떤 손해배상도 하지 않았다. 해커가 거래소를 공격한 탓에 재산을 도난당했다는 투자자에게 “금융기관이 아니므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 거래소도 있었다.
투자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라고 해도, 최근에는 IEO(암호화폐 거래소 공개)가 재부상하면서 한 층 더 진화한 갑질이 나타나고 있다. 거래소들은 IEO를 내걸고 새로운 토큰 판매를 중개하지만 판매된 토큰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여러 거래소는 IEO를 소개하는 웹페이지에 “토큰 구매는 프로젝트 팀(발행사)과 투자자 사이에서 이뤄지며 거래소는 매도인 또는 매매거래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명시해뒀다. IEO 프로젝트가 스캠(사기)으로 판명돼도 거래소는 당사자, 즉 책임의 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블록체인 기업이나 프로젝트 팀에 대한 갑질은 더 만연하다. 거래소들은 틈만 나면 ‘보안 점검’을 이유로 입출금을 막는다. 원화 입출금만 막을 경우 새로운 자금이 유입되지 않는 것에 그치지만 문제는 암호화폐 입출금을 막을 때 발생한다. 거래소가 암호화폐 거래를 일시중지하면 해당 거래소에서 대부분의 거래량을 충당하던 몇몇 암호화폐들은 가격에 치명상을 입는다.
최근 국내 거래소 캐셔레스트는 정기점검을 내세우며 전체 암호화폐 입출금을 막고, 일부 코인 마켓의 거래도 중지시켰다. 해당 거래소에 암호화폐를 상장한 블록체인 기업들은 뜻밖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거래를 막았으니 거래량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암호화폐 가격도 자연히 떨어졌다. 입출금을 막기 직전 6원대였던 가격이 일주일이 지난 현재 3원대로 반토막난 암호화폐도 있다. 가격에 맞춰 세웠을 블록체인 개발 로드맵까지 흔들릴 수 있는 폭락세다. 이 같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 기업들은 제대로 된 항의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들의 사업 성공 여부가 ‘상장 키’를 쥔 거래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프로젝트 팀과 IEO 계약을 맺을 때도 거래소들의 갑질은 계속된다. 최근 IEO를 시도했다는 한 블록체인 프로젝트 관계자는 “어떤 거래소는 7비트코인(BTC)만 내면 IEO와 상장을 해준다고 했다”며 “한 번에 미리 내야 하는 금액”이라고 말했다. IEO가 성공할지 여부도 보장 받지 못하지만, 실낱같은 사업 성공 기회라도 잡아야 하는 탓에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거래소에 착수금을 지불하곤 한다.
이 같은 거래소들의 갑질은 블록체인 생태계 자체를 ‘모순’으로 만들었다. 비트코인 백서 제목은 ‘개인 간(Peer to Peer) 전자화폐 시스템’이며 이더리움 백서 제목은 ‘차세대 스마트컨트랙트와 탈중앙화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이다. 두 ‘블록체인 원조’의 근본정신은 개인 간 거래, 즉 탈중앙화다. 블록체인은 그동안 우리가 신뢰하지 못했던 ‘중앙기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기에 매력적이다.
암호화폐 거래소는 블록체인 기술이 전혀 섞이지 않은, 중앙화된 기관이다. 탈중앙화 생태계의 갑이 중앙화 기관인 기이한 현상이 현 블록체인 업계의 실상이 됐다. 중앙기관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갑질에 휘말리는 모순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거래소들은 암호화폐·블록체인 관련 규정이 전무한 국내 상황을 발판 삼아 ‘책임 없는 사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박현영기자 hyun@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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