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보험·카드 등 금융회사를 거치지 않고도 낮은 비용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어 최근 급성장한 ‘탈중앙화금융(Defi·디파이) 담보대출’에 치명적인 허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디파이가 시세조작이 쉬운 알트코인(비주류 암호화폐) 가격을 고의적으로 부풀려 담보로 제공한 뒤 비트코인(BTC)·이더리움(ETH) 등으로 대출받아 잠적하는 ‘먹튀 세력’의 놀이터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유동성이 낮은 알트코인은 애초에 담보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의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업계에는 지난 19일 글로벌 암호화폐거래소 바이낸스의 디파이 담보대출 서비스 ‘비너스’에서 발생한 담보물 청산 과정에서 특정 암호화폐 시세조종 세력이 1,000억 원에 이르는 차익을 거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디파이는 중앙 관리자가 없는 탈중앙화된 금융 시스템을 말한다. 누군가의 거래 검토, 승인 없이 특정 조건만 맞는다면 스마트 콘트랙트를 통해 자동으로 거래가 성립된다. 가장 상용화된 디파이 서비스가 담보대출이다. 디뱅크 통계 기준 전체 디파이 시장 규모는 677억 달러(약 76조 원)다.
비너스는 동명의 암호화폐 비너스(XVS)를 담보로 예치하면 비트코인 등 다른 암호화폐를 비너스 시세의 최대 80%까지 대출해준다. 비너스를 100만 원어치 예치하면 80만 원어치의 비트코인을 받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단 담보물의 가치도 80%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시세가 하락해 80% 아래로 떨어지면 디파이는 미리 설계된 계약에 따라 담보물을 강제 청산한다.
문제는 특정 세력이 비트코인을 다량으로 대출받기 위해 비너스 가격을 단기간에 급등시켰다는 점이다. 실제 19일 오전 2시 코인마켓캡 기준 비너스 가격은 전일 대비 85% 급등한 143.32달러(약 16만 원)를 기록했다. 거래량은 3억 달러(약 3,380억 원)에서 10억 달러(약 1조 1,200억 원)로 세 배 이상 늘었다. 소수의 고래 투자자들이 비너스 100만 개를 매수하면서 시세를 끌어올렸다는 분석이다.
이들은 가격이 2배 가까이 급등한 비너스를 디파이 플랫폼에 담보로 예치하고 1,890억 원 상당의 비트코인 4,200개를 빌려 인출해갔다. 비트코인을 인출한 뒤 최고점을 기록했던 비너스 가격은 수직 낙하했다. 19일 오후 10시 비너스 가격은 37.57달러(약 4만 2,000원)까지 하락했고 24일 기준 24달러(약 3만 1,000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담보 가치 하락으로 플랫폼에 예치된 비너스는 청산됐지만 최고가에서 대출된 비트코인은 이미 사용자 지갑으로 인출돼 찾을 수 없게 됐다. 시장에서는 이들 세력이 최초 비너스를 매입한 금액이 900억 원 정도 될 것으로 추산한다. 디파이 플랫폼의 허점을 활용해 하루 사이 1,000억 원에 가까운 차익을 거둔 셈이다. 이번 사태를 겪은 비너스 측은 재발 방지책으로 비너스의 담보대출 한도를 55%로 하향 조정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지적이다.
비너스의 사례는 다른 디파이 담보대출 플랫폼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다. 또 다른 디파이 담보대출 플랫폼인 메이커다오는 담보를 맡기면 이에 상응하는 암호화폐 다이(DAI)를 지급한다. 다이는 달러와 가치가 1 대 1로 연동된 이더리움 기반 스테이블코인이다. 메이커다오의 최소 담보 비율은 150%다. 즉 150달러 상당의 담보를 맡기면 100달러 상당의 다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용자가 악의를 갖는다면 시세조작으로 시가총액이 낮은 일부 담보의 가치를 급등시킨 후 이를 맡기고 다이를 받을 수 있다. 컴파운드·에이브 등 다른 디파이 담보대출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점이 반복되면 디파이 담보대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는 만큼 개선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디파이 담보대출의 계약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유동성이 적은 암호화폐는 담보물로 받지 않는 방법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표철민 체인파트너스 대표는 “사람의 개입 없이 코드로만 돌아가는 디파이 특성상 이와 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며 “소수에 의해 가격이 움직일 수 있는 시총이 낮거나 유동성이 적은 암호화폐는 담보로 받지 않는 게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디파이는 중앙 주체 없이 구성원 투표에 의해 운영된다”며 “담보 추가 등 중요한 의사 결정 투표 시 향후 발생할 문제까지 고려해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윤주 기자·김정우 기자 daisyroh@
- 노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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