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총액이 높고, 대규모 총 예치자산(TVL)을 보유한 블록체인 플랫폼들은 대부분 각각 자신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유명인을 한 명씩 가지고 있다. 이더리움의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 테라의 권도형(Do Kwon), 솔라나의 샘 뱅크먼 프라이드(Sam Bankman-Fried)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사람들은 그 블록체인을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팬텀(FTM) 역시 유명 디파이 프로그래머인 안드레 크로네(Andre Cronje)를 보유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안드레 크로네는 지난 2018년 팬텀 재단 설립 때부터 기술 고문으로 참여했고, 와이언 파이낸스(YFI) 등을 만들어낸 후에는 디파이 아키텍트로 활동했다.(자세한 내용은 <넥스트 디파이③ - 솔라나, 팬텀, 아발란체>편에서 참고)
하지만 앞으로는 팬텀 블록체인을 말하면서 안드레 크로네를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안드레가 지난 6일 크립토 업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디파이 대부’라고 불릴 만큼 상징적인 인물이 팀을 영구히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팬텀 생태계 전체가 휘청였다. 안드레는 왜 돌연 은퇴를 선언했으며, 팬텀은 앞으로 어떤 상황을 겪게 될까.
안드레는 지난 1월 본인의 미디엄에 커브 파이낸스(Curve Finance)의 투표 증서(Vote-escrow) 모델과 올림푸스다오(OlympusDAO)의 (3,3) 전략을 차용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예고했다. 이 프로젝트는 솔리들리(Solidly)라는 이름으로 팬텀에서 2월 10일에 런칭을 한다.
디파이 전문가가 가장 트랜디한 모델을 이용해 만든 디파이 프로젝트였던 만큼, 솔리들리는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자체 토큰이 분배되기 시작한 2월 25일 시점부터 가파르게 TVL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솔리들리로 인해 자연스럽게 팬텀 전체 TVL과 네트워크 사용량도 증가했다. ‘솔리들리 전쟁’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커뮤니티의 반응은 뜨거웠으나, 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월 28일 안드레 크로네는 별안간 트위터를 탈퇴한다. 3월 5일께에는 본인의 링크드인 프로필에서 와이언파이낸스(YFI)와 팬텀의 이력을 2022년 2월까지로 변경했다. 그리고 3월 7일 팬텀 재단 선임 솔루션 디자이너 안톤 넬(Anton Nell)과 함께 “진행중인 디파이·크립토 프로젝트에 대한 개발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크립토 업계에서 개발진이나 경영진이 내부 불화 때문에 팀을 떠나는 일은 종종 벌어진다. 안드레가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커뮤니티는 불안에 빠지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한참 탄력을 받고 있던 신생 프로젝트 솔리들리였다. 23억 달러에 달하던 솔리들리의 TVL은 나흘만에 ⅓ 수준인 7억 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75% 언저리에 있던 연간이익(APR)은 12% 대로 내려갔으며 토큰 가격은 42%가 하락했다. 토큰을 예치해놨던 사용자들이 토큰 처분을 하기 위해 플랫폼으로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거래 비용이 많게는 평소보다 20배 이상 올라 사용자들이 출금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솔리들리뿐만 아니라 팬텀 생태계 전체가 악영향을 받았다. 팬텀 토큰(FTM) 가격은 3월 3일부터 7일까지 약 30% 하락했다. 팬텀 대표 탈중앙화거래소(DEX)인 ‘스푸키스왑(SpookySwap)’과 대출 프로토콜인 ‘스크림(Scream)’ 또한 TVL이 30% 가량 감소했다.
마이클 콩(Michael Kong) 팬텀 재단 CEO는 안드레가 이런 선택을 한 연유에 대해서 “그가 커뮤니티로부터 너무 많은 미움을 사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고 전했다. 올해 1월 디파이 프로젝트 공동조직인 프로그 네이션(Frog Nation) CFO인 시푸(@0xsifu)의 사기 전과가 발각됐을 때 안드레와 함께 솔리들리를 만들고 있던 다니엘(Daniele S.)가 시푸를 옹호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안드레는 혼자서 솔리들리의 모든 업무를 맡게됐으며, 출시 이후 나온 제품에 대한 비판(버그, 불편한 UI 등)들이 그대로 안드레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마이클 콩 CEO는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불안해 하는 커뮤니티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설명과 약속을 던졌다. 우선 안드레가 떠난다고 해서 해체되는 프로젝트는 없으며, 모든 프로젝트를 기존의 팀들이 계속 운영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그는 팬텀 재단 트위터를 통해 “안드레의 노고에 감사하지만, 팬텀은 그럼에도 여전히 40명이 넘는 직원이 남아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팬텀은 안드레의 ‘원맨팀’이 아니며 여전히 유능한 팀원들 다수가 함께하고 있다는 의미다.
커뮤니티 반응은 회의적이다. 일단 안드레 크로네 자체가 개발은 물론 프로젝트 홍보와 커뮤니티를 지휘하는 역할까지 하는, 말 그대로 대체 불가능한 만능형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가 사라진 후 팬텀 플랫폼에서 혁신적인 디파이 제품이 계속적으로 나올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라는 반응이 다수다.
더구나 이번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 거래량 폭증으로 네트워크가 느려진 것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팬텀 측은 그동안 자체 개발한 오페라체인 기술을 활용해 초당 30만 회의 거래를 소화할 수 있다고 홍보해왔다. 이에 대한 추가 검증이 필요해진 상황이다.
그나마 안심스러운 지점은 그동안 팬텀이 디파이 생태계 구축에 적지 않은 투자를 진행해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디파이 생태계 인센티브 프로그램에 10억 달러 투자를 집행한 후 반년 동안 팬텀은 TVL이 약 4배 이상 성장했다. 안드레 크로네의 이탈로 화제작인 솔리들리의 TVL이나 토큰 가격이 하락한 것은 사실이나, 제품 자체에 큰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기술력이 검증된 개발 인력 또한 존재한다. 안정적인 거래가 가능한 브릿지와 두터운 실사용자들도 장점이다.
현재 팬텀 생태계는 중요한 기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팬텀은 안드레라는 중요한 인적 자원을 잃었지만 객관적인 상황은 나쁘지 않다. 여전히 좋은 자원들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아마도 ‘이걸로 뭘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그럴듯한 대답을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안드레의 은퇴가 시장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플랫폼과 연관된 유명인의 은퇴 소식이 나옴과 동시에 그가 관여한 프로젝트들의 TVL과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커뮤니티와 시장이 크립토 유명인의 동태에 대해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큰 의미를 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사건인 셈이다. 사람들은 한 편에서는 크립토의 탈중앙성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원한다.
이는 크립토 씬이 산업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시장 규모가 작을수록 능력이 뛰어난 개인이 가지는 영향력은 커진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끌어줄 사람이 있는 프로젝트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각에서는 이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다오(DAO) 체제로 옮겨가려는 시도들도 나오고 있지만, 그 경우에도 다오에 프로포절을 제안하는 사람은 한정적인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는 비탈릭 없는 이더리움을, 샘 뱅크먼 프라이드가 없는 FTX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곳은 낙원일까 지옥일까. 그것이 안드레 크로네가 떠난 뒤 아수라장이 된 팬텀이 우리에 던지는 물음이다.
- 블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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