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관련 입법 논의가 첫 법안이 발의된 지 2년 만에 비로소 시작됐다. 가상자산 업계는 제도화가 발판이 돼 본격적인 산업 육성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했지만 법안이 ‘선(先) 이용자 보호, 후(後) 산업 진흥’으로 가닥이 잡히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최근 테라·루나 사태와 FTX 파산 등이 부각된 점은 이해하지만 규제에만 치우쳐 건전하고 유망한 기업들이 성장할 기회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규제 불확실성 해소와 업계 지원을 위해 △가상자산의 범위 △증권성 판단 기준 △전담기구 신설 △암호화폐 발행 절차 완화 등이 법안에 담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7일 국회와 업계 등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 1소위원회는 지난달 28일 가상자산 관련 법안 18건을 상정해 논의했다. 그간 가상자산 법안은 수차례 법안소위 안건에 올라왔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2년 가까이 공회전했다. 이날 여야는 가상자산 법안 제정이 수차례 미뤄진 점을 감안해 속도를 내자는 데 공감했다. 이에 따라 이용자 보호·불공정거래행위 규제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1차 제정안을 우선 통과시키고 이외 필요한 부분들을 2차로 제정하는 단계적 입법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1차 제정안의 가칭은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다.
입법안의 주목적이 ‘이용자 보호’로 모아지면서 업계가 그간 국내 가상자산 산업 활성화를 위해 요구한 사안들은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가상자산 범위를 명시하는 조항도 제외됐다. 금융위원회는 “가상자산에 뭐를 포함할지를 두고 논란이 굉장히 많은데 법 제정 지연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우선 목적은 이용자 자산 보호와 불공정거래 규제”라고 밝혔다. 이번 입법을 통해 가상자산의 범위를 명확히 세워 사업 불확실성을 해소할 수 있기를 기대했던 사업자들은 허탈한 모습이다. 당장 대체불가토큰(NFT)과 유틸리티토큰 등의 가상자산 포함 여부도 불분명하다.
가상자산 거래소의 운명을 가를 증권성 판단 기준을 제정안에 넣을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올 초 금융 당국이 토큰증권공개(STO)를 허용하며 기존 가상자산의 증권성 판별은 업계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이 기준에 따라 증권으로 분류되는 가상자산의 경우 자본시장법의 적용을 받아 상장폐지 수순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증권성 판단 기준이 업계에서 주목하는 현안인 만큼 이날 회의에서도 상당한 논의가 이뤄졌지만 판단 기준을 넣어야 한다는 국회와 증권성 판단에 유보적인 금융위 간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가상자산을 전담하는 별도 조직 신설에 대한 내용도 이용자 보호를 주목적으로 하는 1차 제정안 포함이 시급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후순위로 밀렸다. 현재 국내에서는 특정금융정보법상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요건을 심사하는 금융감독원과 이후 가상자산사업자를 감시하는 금융위 금융정보분석원(FIU)이 가상자산사업자 운영에 관여한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법에 따른 규제에만 중점을 둬 가상자산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가상자산 외 업무도 많아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업계의 불만이 많다. 채상미 이화여대 교수는 “디지털자산위원회 등 별도 전담 조직이 설립되면 추진력도 있고 관련 전문가도 정확한 의견을 줄 수 있다”며 “금융위나 금감원에서 책임을 분담하기 어렵고 투자자 보호에만 집중돼서 산업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율규제 기구로 출범한 디지털자산거래소공동협의체(DAXA·닥사)의 자율규제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만큼 법률안에 포함돼 금융위나 금감원 또는 전담기구의 관리·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암호화폐공개(ICO)·가상자산거래소공개(IEO) 등 가상자산 발행과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는 법안별 검토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용자 보호와 불공정거래행위 규제 등 최소한의 입법을 추진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해외에 비해 복잡한 가상자산 발행 절차를 두고 있어 다수의 국내 프로젝트들이 해외 가상자산 재단을 통해 ICO를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카카오 블록체인 계열사 그라운드X가 싱가포르에서 발행한 클레이튼(KLAY)과 현대 계열사 HN이 스위스에서 발행한 에이치닥(HDAC)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내에서 ICO를 금지하고 있을 뿐 이들 가상자산 모두 국내 거래소에 상장돼 거래량의 대부분이 국내에서 발생하고 있다. 제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셈이다.
강성후 한국디지털자산사업자연합회(KDA) 회장은 “유럽의 미카법(MiCA)은 400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가상자산과 블록체인의 가치, 발행과 공개, 감독 기관 등을 정하고 있지만 국내는 없다”며 “전 세계적으로 가상자산법은 금융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핵심 요인으로 보는데, 단순히 투자자 보호에만 머무른다면 글로벌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는 이달 중 5대 원화마켓거래소 등 업계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제정안에 대한 공청회를 열어 업계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계획이다. 가상자산 관련 공청회는 2021년 11월 업권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 이후 두 번째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시 공청회는 대선을 앞둔 보여주기 식이어서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며 “이번 공청회에서 실효성 있는 이야기가 오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김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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