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자산으로 정의하고자 했습니다. 미카(MiCA)는 기존 법과 중복되지 않는, 크립토 애셋(Crypto asset)만을 위한 법안입니다.”
지난 달 벨기에 브뤼셀 유럽집행위원회 사무실에서 피터 컬스턴스 EU집행위 고문에게 가상자산을 ‘크립토 애셋’으로 명명한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관련 법을 마련할 때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기존 법 체계에서 자산 범위를 확장해 가상자산을 품는 방식, 또는 가상자산을 위한 별도 법안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전에 없던 자산이 등장한 만큼 구체화된 정의의 필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분산원장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도 모든 자산이 디지털화될 수 있기에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이라는 용어는 후보에서 제외했다. 블록체인 애셋, 분산원장 애셋 등이 후보군에 올랐지만 많은 사람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크립토 애셋으로 정했다.
용어를 수립한 과정을 막힘 없이 설명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국내에서는 이 같은 논의가 충분히 이뤄졌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난 3월 28일 국회 정무위원회는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고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논의했다. 국회 회의록을 살펴보면 가상자산이라는 용어에 대한 합의는 채 1분도 안 돼 이뤄졌다. 김소영 금융위원회부위원장은 가상자산이라는 용어가 괜찮다고 동의했고,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용어나 제명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을 것 같다”며 서둘러 논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업계에선 여전히 용어가 뒤섞여 쓰이고 있다. 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 등 국내 5대 원화 거래소가 모여 있는 공동체 이름은 ‘디지털 자산 거래소 공동협의체(DAXA, Digital Asset eXchange Alliance)다.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는 매년 열어왔던 업비트 개발자 컨퍼런스를 올해 업비트 D 컨퍼런스로 리브랜딩하며 D에 디지털 자산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밝혔다. 하물며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이끌고 있는 위원회 명칭도 ‘디지털자산위원회’다. 가상자산이라는 용어를 주창한 국회조차 이 시장에 대한 명확한 시각을 수립하지 못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사안은 용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용어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이 산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느냐가 핵심이다. 혼란스러운 용어 사용은 산업을 바라보는 혼재된 시각을 방증한다. 세계적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다. 미카 사례를 참조해 한국은 이 산업을 어떻게 바라볼지 보다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 도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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