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크런치 모드(Crunch Mode)’라는 말이 유행했다. 마감을 앞두고 수면과 식사를 포기하면서 업무에 매달리는 기간을 뜻하는 말이다.
블록체인 업계에서도 크런치 모드라고 부를 일이 일어나고 있다.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오픈 카카오톡방, 텔레그램방을 관리하는 게 노동 관행이 됐다. 게임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선 마감을 앞두고 크런치 모드에 돌입하지만, 블록체인 업계에선 암호화폐 가격을 관리하기 위한 크런치 모드가 계속된다. 프로젝트가 발행한 암호화폐가 있고 투자자가 존재하는 한,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들은 끊임없이 가격 상승을 위한 호재를 발표하고 가격 하락의 원인을 해명해야 한다. 게임 업계보다 더 피곤한 크런치 모드일지도 모른다.
블록체인 업계에는 국경이 없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대부분은 해외 프로젝트와 계약을 체결한 경우가 많은데, 국내 근로기준법을 토대로 계약 조건을 내거는 프로젝트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외 다수 프로젝트를 맡은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A 씨는 “많은 프로젝트가 계약 조건에 ‘필요 시 24시간 주 7일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명시한다”며 “특히 해외 프로젝트는 국내 법정 근로시간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속지주의 원칙상 국내 근로자에 대해서는 고용인이 외국 법인이라 하더라도 국내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야 한다. 30인 미만 사업장에는 지난해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가 아직 적용되지 않았지만, 하루 8시간을 초과한 시간은 연장근로에 해당한다. 평일 연장근로 가능 시간은 최대 12시간이다. 밤낮으로 오픈 카카오톡방과 텔레그램방을 관리할 경우 당연히 연장 근로시간을 초과하게 된다.
크런치 모드에 시달리면서도 정식 직원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다수의 해외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한국 마케팅을 위한 임시 계약직으로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 프로젝트도 예외는 아니다. A 씨는 “토큰 세일 기간에만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를 고용하는 경우도 많다”며 “정식 직원으로 대우하지는 않으면서 토큰 세일과 관련된 모든 일을 맡겨 놓는 프로젝트도 있다”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은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며 계약직 여부와 관계없이 적용되지만, 블록체인 업계에선 적법하지 않은 근로환경이 공공연히 나타난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매니저가 근로기준법을 토대로 문제 삼을 수 있는 근로 조건은 여러 가지임에도 문제가 해결될 여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해외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국내 블록체인 프로젝트도 규제 미비를 문제 삼아 해외에 법인을 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권단 법무법인 한별 변호사는 “해외 법인의 경우 감독기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실질적으로는 근로기준법을 강제하기가 어렵다”며 “근로자가 노동청에 고발한 후 노동청에서 해당 사업주에 대한 검찰 고발을 하면, 사업주가 한국에 입국할 때 체포해 조사할 순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문제가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된다. 언론이 ‘크런치 모드’를 언급하며 게임 업계의 노동 환경을 지적한 지는 3년 가까이 됐다. 하지만 이에 맞춰 근로기준법이 개정되고 게임 회사들이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지는 이제 막 1년이다. 현재 시점에서 문제를 인지하지 않는다면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더 큰 문제가 불거질 거다. 곪기 전에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현영기자 hyun@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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